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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 구체具體①- 생각의 군살을 베어내라
  • 김태관
  • 승인 2019.02.0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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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망양(多岐亡羊)=길이 많아서 양을 잃는다. 복잡한 생각들을 걷어내야 길이 보인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인생길도 복잡해진다. 하수는 단순한 것도 복잡하게 만들지만, 고수는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푼다. 복잡한 문제도 답은 간단한 법이다.

 

생각을 도려내는 칼이 있다. 이 칼은 잡초처럼 무성한 생각들을 쳐내어 실체가 또렷이 드러나게 해준다. ‘사고(思考) 절약의 원리’라고도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오컴이 들고 나온 이 면도날은 어떤 일을 설명할 때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한 것이 정답에 가깝다는 논리를 가리킨다. 즉 하나의 현상에 두 개의 설명이 있다면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컨대 길에 돈이 떨어져 있다면 간단히 생각해서 누가 흘렸다고 보면 된다. 이를 확대해석하여 ‘어떤 불순분자가 사회혼란을 야기 시킬 목적으로 부잣집에서 훔친 돈을 길에다 일부러 흘린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맞을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고,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오컴의 면도날은 그런 불필요한 가정들을 잡초 베듯이 밀어버린다.

 

생각이 깊을수록 말은 단순해진다고 한다. 깊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의 말은 쉽고 간결하다. 고수들은 복잡한 생각들을 걷어내고 단순하게 현상을 바라본다. 구체(具體)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 그렇다. ‘구체’는 프로기사 7단의 별칭으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춰서 바둑의 요체를 터득한 경지를 가리킨다. 앞서 삼성그룹의 ‘위기구품을 통해 배우는 리더십의 교훈’이라는 자료에서 보았듯이 ‘구체’에서부터는 경영자에 들어간다. 평사원(초단~3단), 간부(4~6단)를 넘어서 지휘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고단자에 속하는 ‘구체’는 어떤 일을 만나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간결하게 핵심을 찔러 복잡한 문제도 거뜬히 해결한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는 군더더기 생각들을 쳐내고 사안의 핵심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고수들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생각이 단순하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의 일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53년 겨울, 유엔군 사령부에서 정주영에게 긴급한 연락을 보내왔다. 부산에 있는 유엔군 전몰자 묘지에 잔디를 깔아 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다. 닷새 후면 한국전에 참전한 세계 각국의 유엔군 사절들이 내한하기로 돼 있는데,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둘러볼 계획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당시 유엔군 묘지는 아직 단장이 안 돼 묘비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변변한 나무 한 그루조차 심어놓지 않은 모습을 세계 각국의 사절들에게 그대로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한 대로 잔디라도 깔아 푸르게 보이기 위해 정주영을 찾은 것이다.

문제는 닷새라는 촉박한 시간뿐만이 아니라 잔디를 구하는 일이었다. 한겨울에, 그것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푸른 잔디를 어디서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웬만한 사람 같으면 두 손 들 수밖에 없는 난감한 문제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사고로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냈다. 유엔군 측의 설명을 들은 정주영은 “어떻게든 푸른 풀밭으로 만들어 주면 되겠소?” 하고 되물었다. 잔디 공사를 하는 목적이 원래 그것인지라 유엔군 사령부는 바로 수락했다. 정주영이 공사비를 3배로 요구했는데도 다급한 유엔군 측은 선뜻 받아들였다.

정주영은 즉시 직원에게 트럭 30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트럭들을 인솔해 낙동강 근처의 보리밭으로 갔다. 겨울을 맞아 보리가 파릇파릇한 싹을 내민 보리밭은 마치 커다란 잔디밭 같았다. 보리밭을 통째로 사들인 정주영은 그대로 떠서 유엔군 묘지에다 옮겨 심었다.

닷새 뒤 묘지를 방문한 유엔군 사절단은 푸르게 물결치는 보리, 아니 잔디를 보고 “원더풀”을 연발했다. 한겨울의 황량했던 유엔군 묘지가 뚝딱하는 사이에 푸른 풀밭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잔디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베어버리니 불가능해 보였던 문제가 쉽게 풀렸다. 정주영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문제를 바라봤다. “왜 잔디를 심는가” 하는 핵심만을 붙잡았더니 ‘푸른 풀밭’이라는 답이 쉽게 나왔다. 보리를 잔디로 삼는 정주영의 기발한 해법은 잡다한 생각에 매이면 결코 나올 수 없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답도 복잡해지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도 단순해지는 법이다. 현상은 복잡해도 법칙은 단순하다는 말이 있다. 사안이 복잡하다고 그것을 푸는 방법까지 복잡한 것은 아니다. 문제가 어려워 보여도 답은 찾고 나면 의외로 쉬울 수가 있다. 구체(具體) 정도 쯤 되는 고수는 잡다한 설명들을 걷어내고 요점을 붙잡는다. 고수는 불필요한 전제들을 베어버리고 문제의 본질로 직접 다가선다.

 

단순함은 무지함이 아니라 극도의 정교함이라고 한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만을 생각하기에 단순하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작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지만, 단순한 사람은 큰 것 하나만을 붙든다. 작은 생각에 얽매인 사람은 작은 일밖에는 이루지 못한다. 크게 생각해야 큰일을 이룰 수가 있다. 큰일을 이뤄낸 인물들을 보면 큰 것 하나를 붙들고 뚝심 있게 나아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후기의 거상(巨商) 임상옥(林尙沃・1799~1855)도 정주영처럼 잡다한 생각을 걷어내고 큰 것을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TV드라마 <상도>와 소설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임상옥은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인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전설적인 인물이다. 조선조 최고의 갑부로 꼽히는 그의 재산은 회계를 맡은 사람만도 70명이 넘었으며, 그의 집은 손님 700명이 묵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 비축하고 있는 은자 총액이 42만 냥 정도였는데, 임상옥은 세금으로 내는 돈만도 한 해 4만 냥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임상옥의 재산을 엿볼 수 있는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한번은 어떤 이가 진귀한 산호지팡이를 부러뜨렸는데, 남에게 빌린 것이라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그 산호지팡이는 중국에서 구해온 것으로, 조선에서는 돈 주고도 사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임상옥의 집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귀띔해줘서 가보니, 그의 창고에는 산호지팡이가 수백 개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임상옥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를 쌓기까지에는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당대의 세도가 이조판서 박종경과의 만남이었다.

의주상인인 아버지를 따라 18세 때부터 장삿길에 나선 임상옥은 28세 때 아버지가 죽자 돈을 싸들고 한양으로 향했다. 큰 상인이 되려면 정치적 연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박종경이 부친상을 당하자 임상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아무나 만날 수 없는 박종경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문상객들에게 대문이 활짝 열린 박종경의 집에는 여기저기서 부조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지간히 부조를 해서는 명함도 못 들이밀 판이었다. 임상옥은 일생일대의 베팅찬스라고 판단하고는 오천 냥짜리 어음을 끊었다. 쌀 한 가마니 값이 두 냥 남짓하던 시절이라 오천 냥이면 쌀이 이천여 가마니에 해당했다. 낯선 문상객이 내는 부조금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임상옥의 어음을 본 접수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며칠 뒤 임상옥이 예상했던 대로 박종경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임상옥과 처음 대면한 박종경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뱃대만 뻑뻑 빨아댔다. 그러더니 불쑥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자네 남대문으로 하루에 몇 명이나 출입하는지 알겠나?”

임상옥이 캐묻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박종경이 말을 이었다.

“내가 요즘 한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융사의 벼슬을 하고 있는데, 남대문으로 얼마나 사람이 드나드는지 알 수가 없어. 누구는 3천 명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7천 명이라고도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네.”

임상옥은 과연 걸물이었다. 뜻밖의 질문임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두 사람 뿐입니다.”

이번에는 박종경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두 사람 뿐이라고? 남대문으로 수천 명이 드나드는데도?”

임상옥이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남대문으로 하루에 몇 천 명이 출입하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대감 어른께 이(利)가 될 사람과 해(害)를 끼칠 사람인 두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사람은 쓸모가 없으니 셀 필요가 없지요.”

기문(奇問)에 기답(奇答)이었다. 박종경은 감탄해서 무릎을 탁 쳤고, 그 순간에 임상옥의 운명이 바뀌었다. 박종경의 마음을 얻은 임상옥은 그의 권세에 힘입어 나라의 인삼 교역권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계산도 복잡하다. 남대문으로 하루에 몇 명이 드나드는지를 알려면 이것저것 따지고 챙겨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생각이 단순한 사람은 셈법도 단순하다. 임상옥처럼 큰 것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수천 명이라는 숫자도 단숨에 두 명으로 줄일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을 오컴의 면도날로 베어버리고 ‘이와 해’라는 두 개의 경우로 인수분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박종경이 남대문을 들먹인 것도 드나드는 사람 숫자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너는 누구냐?” 즉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냐?”하는 또 다른 질문이 깔려 있었다. 임상옥은 박종경이 던진 질문 뒤에 숨은 진짜 질문을 간파했다. 그래서 곧바로 “나는 대감에게 이로운 사람입니다”라고 박종경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자질구레한 곁가지 생각들에 현혹되지 않고 핵심을 붙잡은 것이다. 임상옥의 짧고 간결한 대답은 단순함이 아니라 고도의 수읽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수들은 깊은 수를 읽고도 평범하게 두어 나간다. 그럴 듯하다고 하여 곁길로 새지 않고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단순함은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수들은 군더더기 생각들을 걷어내고 한 곳을 향하여 간결하게 행마를 한다.

길을 잃는 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길이 적었던 옛날에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도 적었다. 길이 많으면 따져야 할 게 많아 생각도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복잡한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열자> 설부편에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길이 많으면 되레 길을 잃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양자(楊子)의 이웃사람이 양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양을 찾기 위해 온 집안사람을 동원하고도 모자라서 양자네 하인까지 빌려달라고 했다.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요란을 떠는 거요?”

“갈림길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참 만에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찌 된 까닭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나타나더군요.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고, 방법이 많아서 방향을 잃게 된다. 길이 많을 때는 길을 버리고, 생각이 많을 때는 생각을 쳐내야 한다. 선택은 포기의 다른 이름으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고수는 승리의 길로 가기 위해 다른 곁가지들은 과감히 내친다. ‘구체’의 고수가 된다는 것은 버리기를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갈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길이 없는 까닭만은 아니다. 다른 여러 생각들이 잡초처럼 우거져 그대의 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생각들을 쳐내고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라. 생각도 군살을 빼야 가뿐하다. 생각이 복잡하면 인생길도 복잡해진다. 쳐내면 간단하고, 버리면 가볍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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