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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판에 담긴 히타이트 문명의 비밀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8.12.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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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은 인터넷 과학신문 <The Science Tim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

 

1834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를 텍시에르는 터키에서 탐사 여행을 하던 중 보아즈쾨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바퀴자국을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가 큰 돌덩이들이 열을 지어서 늘어선 곳을 발견했다.

순간 그는 긴장했다. 그곳이 혹시 자신이 찾아나섰던 타비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타비움은 고대 로마 시대의 켈트족이 정착했다는 소아시아의 도시였다. 그 지역을 좀 더 면밀히 탐사하던 중 텍시에르는 맞은편의 고원지대에서 문자가 새겨진 암벽을 발견했다.

신전처럼 보이는 그곳은 바위 사이의 빈 공간을 이용해 만든 회랑과 제사용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회랑의 표면에는 신들을 형상을 표현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생소한 양식이었다. 그곳이 바로 바위로 만든 신전인 ‘야질리카야’였다.

세계 최초로 철기문화를 발달시킨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 유적지. ⓒ UNESCO / Author : Francesco Bandarin

고국으로 돌아간 후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1839년 ‘소아시아 소묘’라는 여행기로 발간했다. 그 책을 읽은 당시 역사학자들은 당혹스러워 했다. 소아시아에 그처럼 매혹적인 유적을 남길 만한 강한 세력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몇 서구 학자들이 보아즈쾨이를 방문해 조사를 벌였으나, 이 유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40년 후 그 유적이 바로 히타이트 제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영국의 젊은 학자 아치볼드 헨리 세이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발견된 기념물과 금석물들이 히타이트의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 논쟁만 불러일으켰을 뿐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적지 역시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다 1905년 설형문자로 기록된 다량의 점토판이 발견되면서 마침내 그곳이 히타이트 제국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교역 장부를 비롯해 편지, 종교 문서, 계약서 등등 설형문자의 문서는 매우 다양했다. 그중에서 특히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사본은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후 독일 및 터키의 공동 연구팀에 의해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에 대한 연구가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독일 고고학회에서는 장기간의 연구 계획을 세워 하투샤를 탐사했으며, 이곳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아나톨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제국이다. 세계 최초로 철기문화를 발달시킨 그들은 직접 만든 철제 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이용해 주변국들을 점령하고 지배했다. 당시 히타이트 이외의 지역에서도 철을 만들 수 있었지만, 히타이트에 비해 제련 기술이 떨어져 상당히 조악했다.

터키 수도 앙카라의 동쪽으로 약 150㎞ 떨어진 고지대 아나톨리아의 장엄한 평원을 배경으로 한 하투샤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다. 동서 1.3㎞, 남북 2.1㎞의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하투샤는 너비 8m, 최대 높이 6m 규모의 이중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던 성채 도시다.

하투샤는 원래 아시리아인들이 건설한 도시여서 기원전 1720년 무렵 히타이트의 아니타 왕에 의해 파괴됐다. 그러나 기원전 1600년경 주변 왕국을 통일한 나바르나스 1세가 하투샤를 재건했으며, 기원전 1650년경에 등극한 하투실리 1세가 하투샤를 수도로 삼았다.

도시의 동쪽에는 왕궁과 성채 유적이 있으며, 남쪽에는 4개의 신전이 남아 있다. 북서쪽으로는 유적의 일부인 보아즈쾨이 마을과 로어 타운이 있으며, 성벽 밖 북동쪽의 2㎞ 지점에 바위로 만든 신전인 야질리카야가 있다.

이곳이 그동안 거대한 제국의 수도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던 것은 이해하기 힘든 위치와 지형 때문이다. 건물을 세우기 힘든 가파른 절벽과 산봉우리가 많은 지형, 게다가 고원지대 특유의 심한 일교차까지 철기문화를 최초로 발전시킨 대제국이 왜 이 같은 곳에 수도를 건설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히타이트는 자신들이 개발한 제철 기술을 극비로 관리함으로써 인접국에 누출시키지 않았다. 각종 철기는 당시 수도였던 하투샤 인근의 제철소에서 제조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해상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이후 히타이트의 철기문화가 주변 국가로 유출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힘을 가진 국가들이 탄생했다. 그에 따라 오리엔트 지역의 군사적 균형이 무너지고 다시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 히타이트가 철을 최초로 제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터키의 카만 카레육 유적에서 히타이트보다 400년이나 앞선 철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타이트의 철기 문화는 독창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타 민족이 이미 갖고 있던 낮은 수준의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하투샤 성벽 동쪽에 있는 ‘왕의 문’과 서쪽에 있는 ‘사자의 문’, 그리고 부조와 유적이 있는 야질리카야 암벽은 독특한 히타이트의 예술적 성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히타이트의 예술 및 문명은 에게 해의 예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하투샤 고고 유적지는 정돈된 도시 구조를 비롯해 사원, 왕궁 거처, 요새 등 히타이트 문명의 독특한 증거를 담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또한 이곳이 히타이트의 유적지임을 입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약 2만5000장의 설형문자 점토판 기록물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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