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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돔과 아우슈비츠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8.10.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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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은 인터넷 과학신문 <The Science Tim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

 

지난 5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현직 미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묵념을 올렸다. 하지만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다리로 연결된 원폭돔 시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동 경로 중간에 사유지가 있어서 경호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작 보고 싶어 했던 원폭돔의 건물 안에 있는 시계는 항상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이유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바로 그때부터 멈추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새벽, 사이판 남쪽의 작은 섬에서 미국 해군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이 모는 B-29 폭격기가 이륙했다. 몇 시간 후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난 그 폭격기는 고도 9470m 상공에서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히로시마 원폭돔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이유는 수직 방향의 충격파를 받은 덕분이다. ⓒ UNESCO / Author : G. Boccardi

길이 약 3m, 지름 71㎝, 무게 약 4톤의 리틀보이는 43초 동안 떨어져 고도 550m 상공에서 폭발했다. TNT 약 2만톤에 해당하는 리틀보이의 위력은 대단했다. 엄청난 섬광과 함께 온도가 7000도까지 치솟았으며, 반경 1.6㎞ 이내의 건물 90%가 파괴됐다.

또 시속 32㎞에 달하는 충격파의 발생으로 인해 사람과 건물 파편이 날아다녔다. 엄청난 열기는 수천 건의 화재를 발생시켰으며, 반경 3㎞ 내에 있는 사람들은 치명적인 화상을 입었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는 34만명이 조금 넘었는데, 폭발 직후 7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며 방사능 오염 등으로 희생된 사람까지 합치면 총 1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히로시마가 일본의 많은 도시 중 첫 원폭의 목표가 된 이유는 군사도시였기 때문이다. 마쓰다 및 미쓰비시 등의 많은 공장이 들어서 산업이 번창한 이곳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무기제조창으로 삼았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인 원폭돔은 히로시마의 이 같은 도시 배경으로 인해 지어졌다. 히로시마에서 생산되는 각종 산업 제품들을 전시․판매하고 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지어진 상업전시관이었던 것이다.

체코 출신의 건축가인 얀 레츠르의 설계로 1915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25m에 5층이었다. 벽돌로 지은 3층 건물 위에 구리로 덮인 철골의 2층짜리 타원형 돔이 얹어진 형태였다. 이후 상업전시관은 히로시마 상품진열관에서 산업장려관으로 이름이 몇 차례 바뀌다가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직전에는 일본 내무성의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이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이유는 폭심지의 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직 방향의 충격파를 받은 덕분에 돔 아래 건물 중심부의 일부 뼈대가 남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직접 접은 종이학을 일본 어린이에게 전달하는 깜짝 이벤트를 펼쳤다. 그 이벤트는 원폭돔이 철거되지 않고 보존된 사연과 관련이 깊다.

2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사사키 사타코란 소녀는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으로 믿고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하지만 964마리의 종이학을 접은 후 결국 피폭 후유증으로 12살의 나이에 숨졌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각지의 어린이들이 종이학을 접어 보내기 시작했고, ‘히로시마 종이학 클럽’이라는 어린이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5년 후 히로코 카지야마라는 여고생이 백혈병으로 숨졌다. 이 학생 역시 히로시마 피폭 때 방사능에 노출된 탓에 백혈병을 얻었는데, 사후 그녀의 일기장에서 ‘히로시마 산업장려관(원폭돔의 명칭)을 보면 영원히 세상에 원자폭탄의 끔찍함을 알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발견된 것. 그 글은 원폭돔을 보존할 것인지 철거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던 때 종이학 클럽에 알려져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는 돔을 영구 보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히로시마 시의회는 1992년에 이 건물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지만, 미국과 중국은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원폭돔의 세계유산 등재는 원자폭탄을 사용하기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탈색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1996년 히로시마 원폭돔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던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핵무기 폐기 및 영원한 인류 평화를 추구한다는 서약의 상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 주변에는 10여 만명의 우리 동포가 징용이나 강제징집 돼 있었는데, 그중 2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당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한쪽에는 이들을 위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다. 자신들의 조국이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강대국 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된 이들이야말로 원자폭탄의 진정한 피해자들인 셈이다.

그런데 히로시마 시가 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상업전시관(원폭돔의 최초 명칭)을 세우기로 처음 결정한 것은 공교롭게도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우리의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이었다.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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