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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11)] 약우若愚②- 어리석음은 고수의 비밀병기
  •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10.0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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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용지 대인용우(小人用智 大人用愚)=소인은 지혜를 사용하고, 대인은 어리석음을 사용한다. 하수는 똑똑해야 이기는 줄로만 안다. 그러나 고수는 어리석은 체하며 승리를 낚아챈다. 지혜는 누구나 쓰지만, 어리석음은 고수만이 쓸 수 있는 비밀병기다.

 

어떤 골동품 상인이 시골식당에 들렀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식당주인이 개에게 밥을 주는데 보니까 개밥그릇이 귀한 고려청자가 아닌가. 다짜고짜 개밥그릇을 사겠다고 하면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골동품 상인이 꾀를 내었다.

“이보시오. 주인장. 그 개를 나한테 파시오.”

“이 개는 별 거 아닌 잡종인데 사시겠다고요?”

“마음에 들어서 그러니 값은 달라는 대로 주겠소.”

수지맞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식당주인에게 골동품상이 슬쩍 말을 건넸다.

“이제 개를 샀으니 저 개밥그릇도 나한테 넘기시오.”

그러자 식당주인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저 밥그릇 덕분에 판 개가 수십 마리도 더 되는데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약은 체했던 골동품 상인이 어리숙해 보이는 식당주인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 식당주인이야말로 바둑으로 치면 약우(若愚)에 해당한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오히려 약은 체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는 게 약우의 경지다.

 

조선중기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내기바둑 이야기에서도 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먼 일가붙이인 서천령(西川令)은 바둑을 잘 두어 팔도 제일의 국수라고 소문이 났다. 밥보다 바둑을 더 좋아한 서천령의 사랑방에는 전국에서 온 기객(棋客)들로 날마다 북적거렸다. 하지만 하나같이 서천령보다 수가 얕아 대국을 하면 연전연패할 뿐이었다. 서천령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다며 으스댔다.

 

어느 날 웬 시골농부 하나가 말 한 필을 끌고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농부의 행색은 남루했지만 말은 보기 드문 준마여서 금세 눈에 띄었다. 서천령이 이상히 여겨 농부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찾아왔는가?”

“어른께서 바둑을 잘 둔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한 번 겨뤄보고 싶어 왔습니다.”

서천령이 농부와 말을 번갈아 쳐다보다 시큰둥하게 뱉었다.

“허어, 나는 내기바둑이 아니면 두지를 않네. 크든 작든 내기가 걸려야 제 실력이 나오는 법이거든.”

“저는 한양으로 3년 동안 군역(軍役)을 살러 왔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주머니가 비었으니 제가 타고 온 말을 잡히고 바둑을 두면 어떻겠습니까?”

“지면 저 말을 나에게 빼앗길 텐데도 두겠나?”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서천령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속으로 비웃으며 바둑판을 가져오게 했다. 대국을 시작하자 시골농부의 실력은 짐작대로 서천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세 판을 두기로 했는데 두 판을 내리 패하자 농부가 선뜻 바둑판을 물리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졌습니다. 청컨대 저 말을 잘 먹여 주십시오. 3년 뒤 군대 복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다시 바둑을 겨뤄서 찾아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게”

서천령은 농부의 리턴매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준마를 얻은 그는 횡재했다 싶어 정성스레 길렀다.

 

3년이 지나자 과연 농부가 군역을 마쳤다며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 재 대국을 시작하자마자 서천령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상대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사람은 예전 그대로인데 농부의 바둑실력은 영 딴판이었다. 천하무적임을 자랑하던 서천령은 결국 이름도 없는 촌뜨기에게 내리 세 판을 패하고 말았다. 농부는 그동안 잘 먹여 피둥피둥 살이 오른 준마를 끌고 가며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인은 이 말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한양에서 복무를 하는 동안에는 어디 맡길 데가 없어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심하다가 어른께서 바둑을 좋아 하신다기에 일을 꾸며서 잠시 맡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잘 길러주셨으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리숙하게 보이는 시골농부가 조선제일의 국수라는 서천령보다 한 수 위였다. 농부는 어리석음을 내걸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반면에 서천령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덤벼들었다가 망신을 당했다. 농부는 진짜 제 실력을 어리석음으로 포장한 ‘약우’의 고수였다.

 

하수는 지혜로움의 쓸모만 알지, 어리석음의 쓸모는 모른다. 그러나 고수는 어리석음의 쓸모를 알아 목적에 맞게 써 먹는다. 어리석음을 내세워 위기를 탈출한 예는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남송(南宋)시대의 첫 번째 황제인 조구(趙構)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라고 하겠다.

 

북송 말엽 금나라의 침공으로 형세가 위급해지자 송흠종(宋欽宗)은 화친책을 모색했다. 금나라에서는 화친조건으로 황제의 친족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놓고 흠종은 고민에 빠졌다. 볼모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서 여간 현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흠종은 동생인 조구를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구가 고민에 빠졌다.

“금나라의 인질로 가라는 것은 사지(死地)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부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조구가 측근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조구의 애첩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리께서는 너무 지혜로우신 분이라서 볼모로 가게 되었군요. 차라리 어리석은 분이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이 말에 조구의 귀가 번쩍 틔었다. 조구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구나! 난 이제 살았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지만 조구는 살 길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내가 지혜롭게 보여서 인질로 가게 됐다면 어리석게 보이면 될 것이 아닌가. 바보처럼 군다면 금나라에서도 쓸모없는 자를 볼모로 붙잡고 있지는 않겠지.”

금나라로 들어간 조구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멍청하게 행동했다. 금나라 신하들이 모욕적인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딴청을 부렸다. 마침내 금나라는 조구가 적통(嫡統)이 아니라는 이유를 달아 볼모 교체를 요구했다. 무사히 돌아온 조구는 북송이 멸망해 황족 모두가 끌려갈 때에도 요행히 화를 면해 마침내 남송의 개조인 송고종(宋高宗)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어리석음은 나쁜 것으로 간주해 쓸모가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다. 그러나 고수들은 그런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상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말하는 자는 두렵지 않지만, 스스로 어리석다고 말하는 자는 두렵다(言智者莫畏 畏言愚也)”는 말이 있다. 어리석어 보인다고 만심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고려가요인 ‘예성강곡(禮成江曲)’을 둘러싼 내기바둑 이야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성강은 황해도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개성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서울에 한강이 있듯이 고려 오백 년의 도읍인 개성에는 예성강이 있다. 물자는 강을 따라 흘러들고, 사람은 물자를 따라 흘러든다.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는 또한 수많은 사연들이 모여든다.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는 온갖 물자와 함께 온갖 사람들이 붐볐으며, 갖가지 사연이 각색의 물결을 이루어 일렁거렸다. 송나라 상인 하두강이라는 자도 물자를 싣고 예성강에 흘러들었다가 희비의 포말을 일으킨다.

 

어느 날 하두강은 예성강가에서 한 아리따운 부인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자기 여자로 삼아야겠다고 흑심을 품었다. 바둑을 잘 두는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접근하여 돈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 남편의 연전연승이었다. 고수인 하두강이 바둑수를 속여서 짐짓 못 두는 체했기 때문이다. 내기바둑에서 계속 돈을 따자 그녀의 남편은 입이 헤벌어졌다. “봉 잡았다” 싶은 그는 그것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하두강의 돈을 넙죽넙죽 받아먹기에 바빴다. 완전히 걸려들었다고 판단한 하두강이 일부러 열 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 이거 자꾸 지기만 하니…. 안 되겠소. 이판사판이오. 우리 큰 거 한판으로 아주 끝장을 봅시다.”

“큰 거 한판이라면?”

“내 배에 싣고 온 모든 물자를 걸겠소. 대신 그쪽도 가진 것을 모두 거시오.”

“난 가진 것이 그만큼 안 되는데….”

“그럼 아내라도 거시오.”

“그럽시다.”

남편은 돈을 많이 따서 미안하기도 한지라 냉큼 승낙했다. 그리하여 하두강의 배에 실린 모든 물건과 남편의 미인 아내를 두고 큰 내기가 벌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하두강은 본래의 바둑실력을 발휘하여 하수에 불과한 남편을 호박에 침놓듯이 손쉽게 꺾어 버렸다. 남편은 아얏 소리도 못 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이국 상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뒤늦게 자신의 멍청함을 뉘우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내를 싣고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남편은 애타는 심정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것이 ‘예성강곡’ 전편이다.

 

그런데 여인을 실은 하두강의 배는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났다. 사나운 풍랑 속에서 배가 나아가지 못하자 점을 쳐보니 여인을 강제로 태운 것이 서해 용왕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할 수 없이 하두강은 뱃머리를 돌려 여인을 되돌려 보냈다. 무사히 남편과 재회한 아내는 감개무량하여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것이 ‘예성강곡’ 후편이다.

 

‘예성강곡’에는 어리석음이 빚어낸 희비의 쌍곡선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고 있다. 처음에 돈을 계속 잃기만 하는 송나라 상인은 남편이 보기에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어리석은 것은 남편이었다. 그것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덥석 물었던 것은 미련한 하수의 짓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남편은 스스로 똑똑한 줄 알았지만 어리석었고, 송 상인은 겉으로 어리석어 보였으나 실은 그 반대였다.

 

<법구경>에 “스스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자는 슬기롭고,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은 지혜를 감춘 고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상대가 어리석어 보일수록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똑똑한 체 하는 이들은 많아도 어리석은 체 할 줄 아는 이들은 드물다. 똑똑함의 쓸모는 알아도 어리석음의 쓸모는 잘 모르는 까닭이다.

고수가 되고 싶은가. 어리석음의 사용법을 배우라. 지혜는 누구나 다 쓰는 무기지만, 어리석음은 고수만이 쓸 수 있는 비밀병기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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