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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9)] 수졸② - 죽은 자를 조심하라
  •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09.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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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다. 움직인다고 산 자가 아니고, 누웠다고 죽은 자가 아니다. 죽고 산 것을 모르면 살아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하수는 사활에 속고, 고수는 사활을 속인다. 죽지 않으려면 죽은 자에게 속지 말라.

 

살아있는 돌과 죽은 돌, 사활을 아는 것은 바둑의 기초다. 바둑수업은 사활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바둑의 기초 중의 기초인 사활을 제대로 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사활을 착각하여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이는 마치 살아있는 전기선을 죽은 줄로 알고 만지는 것과 같다. 시퍼렇게 전기가 흐르고 있는데 전원 코드를 뽑은 것으로 착각하여 무심코 만지다가는 큰일이 난다.

 

인생바둑도 마찬가지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줄로 치부했다가 큰 화를 당한 경우는 역사에서 비일비재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하나 꼽자면 단연 <사기열전>에 나오는 범저(范雎)의 이야기일 것이다.

범저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유명한 외교정책으로 진(秦)나라가 강국이 되는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원래는 위(魏)나라 출신으로, 세 치의 혀로써 입신양명을 꿈꾸는 유세객이었다. 처음에는 위왕을 섬기려고 했으나 연줄이 없어서 우선 중대부인 수가(須賈)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수가는 그다지 신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은 수가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외교성과가 없었다. 이대로 귀국했다가는 책임추궁을 못 면할 게 뻔했기에 수가는 전전긍긍했다. 이런 가운데 수가의 수행원인 범저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말이 제나라 왕의 귀에 들어갔다. 제나라 왕은 범저를 회유하기 위해 숙소로 금 10근과 쇠고기와 술을 보냈다.

“이것은 위험하다. 받았다가는 나중에 큰 문제가 될지 모른다.”

영리한 범저는 예의상 쇠고기와 술만 받고 금은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수가가 무릎을 쳤다.

“옳거니, 잘 걸렸다. 안 그래도 빈손으로 귀국할 판이니, 범저에게 덤터기를 씌우자!”

위나라로 돌아온 수가는 범저에게 첩자라는 누명을 씌웠다.

“글쎄, 범저라는 놈이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팔아넘겼지 뭡니까. 그 바람에 일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수가의 말을 들은 재상 위제는 불같이 노했다. 위제에게 끌려간 범저는 이가 뽑히고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았다. 하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멍석에 둘둘 말아 측간 구석에 갖다버렸다. 사람들은 송장이 된 범저의 몸에다 오줌을 갈겼다.

“나라의 기밀을 팔아넘기다니, 참으로 똥오줌만도 못한 놈이 아닌가!”

 

그러나 범저는 진짜로 죽은 게 아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멍석에 말린 채로 죽은 체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야심한 시각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경비병을 불렀다.

“이보시오, 나 좀 살려주시오!”

“헉! 이 자가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 지경이 됐소. 제발 나를 좀 구해주시오.”

“허, 그대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구려.”

“나를 여기서 탈출시켜 주면 나중에 반드시 은혜를 갚겠소.”

“인명은 하늘에 달렸소. 아무튼 기회나 봅시다.”

 

구사일생으로 사지에서 탈출한 범저는 정안평(鄭安平)이라는 지인의 집에 몸을 숨겼다. 평소에 범수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던 정안평은 한밤중에 찾아온 범저를 서둘러 받아주었고, 이름도 장록(張祿)으로 바꾸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진(秦)나라로부터 사신이 와서 정안평과 안부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사신으로 오가며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진나라 사신이 위나라를 떠나 귀국하게 됐을 때 지나가는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함께 데리고 갈만한 인물은 없을까? 우리 진나라는 나라를 흥왕 시킬 인재들을 천하에서 두루 구하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 장록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 천하의 현인입니다. 진나라로 가면 반드시 크게 쓰일 것입니다”

 

장록으로 변신한 범저는 진나라 사신의 수레를 타고 위나라를 탈출했다. 그런데 그의 일행이 위나라 국경을 막 벗어나려고 하는데 한 떼의 화려한 수레행렬과 맞닥뜨려지게 됐다. 범저가 물었다.

“누구의 행차입니까?”

“위나라의 실권자 양후의 수레 행렬입니다.”

그러자 범저는 양후의 눈에 띄지 않게 수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양후는 진나라 사신의 수레로 다가와 몇 마디 물어본 뒤 다시 자기 길을 떠났다. 양후의 행렬이 멀어지자 범저는 황급히 수레에서 뛰어내려 근처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진나라 사신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아니, 어찌 그러십니까? 양후는 이미 멀리 가버렸는데요.”

“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양후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수레 속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찜찜해 하는 표정이었거든요.”

과연 범저의 말대로 잠시 뒤 양후가 되돌아와 진나라 사신의 수레를 속까지 이 잡듯이 뒤졌다.

“햐, 장록 선생은 과연 비범한 인물이구나!”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돌아온 사신은 소왕(昭王)에게 범저를 천거했다. 범저는 탁월한 언변과 원교근공의 계책으로 소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진나라에 둥지를 튼 범저의 공로는 혁혁했다. 그는 소왕을 도와 진나라의 고질병 같은 외척정치를 일거에 청산하게 했고, 조나라 군대 40만 명을 몰살시켜 다른 6개 나라가 합종을 거론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또 촉과 한중을 연결하는 잔도(棧道)를 1천리나 개척해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장록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위나라에서는 진나라 재상이 죽은 범저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려한다는 소문이 번졌다. 다급해진 위나라는 진나라를 달래기 위해 수가를 사신으로 보냈다. 수가가 함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범저는 잠자던 분노가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범저는 치가 떨리는 분노를 억누르고 일부러 남루한 차림을 하고 혼자 밤에 몰래 수가를 찾아갔다. 뜻밖의 장소에서 범저와 재회한 수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자네는 범저가 아닌가! 아직도 살아있다니, 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지요.”

수가는 범저가 불쌍하게 보여 솜옷 한 벌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진나라에는 장록이라는 재상이 있다는데, 듣자하니 왕의 총애를 받아 그가 나랏일을 도맡아 결재한다더군. 누가 다리를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장록 재상과 친한 사람을 알고 있지는 않은가?”

범저가 시침을 떼고 말했다.

“저의 주인이 장록 재상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매일 만나 안부를 나눌 정도로 잘 알고 있으니, 제가 한 번 주선해 보겠습니다.”

“허어. 그래? 지금 만나볼 수 있겠는가?”

“예. 마침 주인님이 재상 관저에 계십니다. 함께 가시지요.”

이에 수가는 범저와 한 수레를 타고 진나라 재상의 관저로 향했다. 관저 문 앞에 이르자 범저가 훌쩍 뛰어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던 수가는 답답함을 못 이겨 문지기에게 물었다.

“여보게. 아까 안으로 들어간 범저가 왜 이렇게 안 나오는가?”

“예? 범저라니요? 좀 전에 들어가신 분은 이 나라의 재상 장록 어르신인데요.”

그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수가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수가는 벌벌 떨며 무릎으로 기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상인 범저 앞에 엎드려 연신 머리를 땅에 짓찧었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이놈이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범저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죽을 죄? 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는 있느냐?”

“저의 머리털을 모두 뽑아 헤아려도 속죄를 다 못할 만큼 많습니다. 가마솥에 끓여 죽여도 마땅하지만은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범저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지를 찢어 죽여 마땅하다마는 목숨만은 살려준다. 아까 네가 나에게 솜 옷 한 벌 주었던 것이 가상해서다. 냉큼 물러가거라!”

수가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내뺐다.

 

산 자를 죽은 자인 줄로 알아 크게 낭패를 본 경우다. 범저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시퍼렇게 살아 복수극을 펼친 사례는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병법가 손빈은 라이벌 방연에게 다리를 잘린 뒤 똥을 주워 먹는 등 미친 체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방연은 불구에 정신병자가 된 손빈을 죽은 자나 다름없다고 방심했다가 훗날 결국 손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유비는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천둥소리에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등 어리석은 사람인 체 행동해 화를 모면했다. 이런 도회술(韜晦術)은 파락호 행세를 하며 후일을 도모한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죽은 자라고 해서 다 죽은 것이 아니고, 산 자라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 가면을 쓴 겉모습에 속아 사활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면 패망을 면치 못하게 된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이야기도 그것을 보여준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마의는 제갈량의 생사를 착각하여 우스개를 당한다. 죽었다던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나아오는 것을 보고 사마의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묻는다.

“내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느냐?”

이런 망신을 당한 사마의이지만 실제의 역사를 보면 그는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의심 많은 조조의 휘하에서 입지를 굳히고 조비, 조예, 조방에 이르기까지 위나라 세 임금을 차례로 섬긴 그의 처세술은 노련함 그 자체였다. 특히 죽은 체하는 허허실실의 연기로 산 자를 농락한 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사마의의 주특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말년에 치매에 걸린 노인 연기로 정적들의 눈을 속인 것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조방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등극하자 신 실세들에게 사마의는 눈엣가시였다.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자 정적들은 꾀병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 중 하나가 집에 찾아왔을 때 사마의는 헛소리를 하고 손을 떨며 침을 질질 흘리는 치매 연기로 감쪽같이 눈을 속인다. 사마의가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 정적들은 경계심을 풀었고, 결국 사마의가 일으킨 정변에 제거당하고 만다. 사마의의 사활을 착각한 것이 치명적인 화근이었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있었던 사마의나 범저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산 자를 죽은 자로 치부하여 우습게 여기면 재앙을 당하고, 죽은 자를 산 자로 알아 무섭게 여기면 망신을 당하는 법이다. 바둑에서도 인생에서도 사활을 제대로 아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기본이 된다.

 

하수는 사활에 속고, 고수는 사활을 속인다. 죽은 공명은 오늘도 산 중달을 놀라게 하고, 죽은 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퍼렇게 살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죽고 산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대는 살아있는가? 그대가 죽었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로 죽었는가?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webmaster@ndsof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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