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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 (6)] 이겨 놓고 싸워라
  •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07.1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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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승구전(先勝求戰)=이기는 군대는 이겨 놓은 다음에 싸운다. 반면에 지는 군대는 싸움부터 하고본다. 승리의 비결은 의외로 쉽다. 질 게 뻔한 싸움은 안 하면 된다.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고, 이겨 놓고 싸워라.

 

전쟁에서 항상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워라”이다. 썰렁한 이야기라고 흘려버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의 가르침이다.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이길 수 없으면 지켜야 한다. 공격은 이길 수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다.”

손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예로부터 싸움을 잘한다고 일컬어진 자들은 모두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해서 승리했다.”

자고로 싸움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들은 질 게 빤한 싸움은 안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손자는 “승리란 이미 패배한 자를 상대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승리는 이기게 돼 있는 싸움을 싸워서 이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승리하는 군대는 이겨놓은 뒤에 싸움에 나서고, 패하는 군대는 싸움부터 시작한 뒤에 이기려고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중국 남송(南宋) 때의 국수 유중보(劉仲甫)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바둑을 항상 이기는 비법이 있습니까?”

유중보의 대답은 간단했다.

“항상 이기는 비법은 없으나 지지 않는 방법은 있소. 그것은 바둑을 두지 않는 것이오!”

기결(棋訣)을 4편 짓기도 했던 유중보가 말한 필승의 비결은 “안 두면 안 진다”는 것이었다. 싱겁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일찍이 손자가 가르쳤던 것이기도 하다. <손자병법> 군형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전쟁에서 지지 않는 여건은 나에게 달려있고, 이기는 여건은 적에게 달려있다.”

수비는 내가 잘하면 되고, 공격은 적에게 허점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패배는 내가 만드는 것이고, 승리는 상대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이기는 것은 장담할 수 없지만 지지 않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싸우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기려면 이기는 싸움만 하라는 손자의 말은 일견 따르기 쉬워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결코 만만하게 들을 말이 아니다. 이기는 싸움만 하려면 먼저 이길 싸움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싸움의 승패를 내다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쟁에는 피아(彼我)가 있으므로 적을 알고 나를 안 뒤에야 승패를 저울질할 수 있다.

 

지피지기를 강조한 손자는 모공(謀攻)편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이기고 질 확률이 반반이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

또 지형(地形)편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아군의 공격 능력만 알고 적의 방어능력을 모른다면 승률은 반반이다. 적의 방어능력만 알고 아군의 공격능력을 모른다면 역시 승률은 반반이다. 적과 아군의 전력을 안다 해도 지형이 불리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역시 승률은 반반이다.”

 

승리의 비결은 쉬워도, 문제는 지피지기 자체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싸움은 서로 자기가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벌이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피차 자기를 모르기에 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상대를 제대로 알면 무모한 싸움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알파고와의 대결로 유명한 이세돌 9단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2016년 3월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과의 역사적 대결을 앞두고 이세돌은 자신이 5대0 내지는 4대1로 이길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결과는 1대 4로 이세돌의 완패였다. 이세돌은 상대인 알파고의 실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대국에 임한 것이다. 딥러닝 방식으로 스스로 바둑을 학습해 나가는 알파고는 하루가 다르게 그 실력이 늘고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알파고의 최종버전인 알파고제로는 인간의 기보 한 장 없이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 40일 만에 3천년 역사의 인류 바둑을 뛰어넘었다. 애초에 이를 알았더라면 이세돌은 아마 알파고와의 대결을 그렇게 쉽게 수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백전백패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방법은 없으나 지지 않는 방법은 있다. 남송의 국수 유중보의 말대로 바둑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 또한 불리하면 지키라는 손자병법의 가르침과도 맥이 닿아 있다. 반면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가 않다. 이세돌이 한창 이름을 떨치던 시절의 에피소드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2004년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대회 결승3번기를 앞두고서의 일이다. 이세돌 9단은 중국의 신예강자 왕시(王檄·당시 5단)와 우승을 다투게 됐다. 거액의 우승상금이 걸린 세계타이틀매치를 놓고 세인들의 관심은 한껏 고조되었다. ‘중국의 이창호’라고 불리는 왕시 5단은 침착하고 두터운 행마로 뭇 강호들을 꺾고 결승에 오른 대륙의 샛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승 제1국을 앞두고 대회 관계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이세돌 9단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 미안해서 어쩌죠? 아무래도 이번 결승전은 제3국까지 가지는 못할 것 같아요.”

당시 이세돌 9단은 감기에 걸려 몸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말하는 것을 본 대회 관계자는 당연히 이세돌이 0대2로 질 것 같다는 겸손의 말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어진 이세돌의 말을 들은 대회 관계자는 그만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냥 두 판으로 끝내야 할 것 같아요.”

2대0으로 일찍 끝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큰 상금이 걸린 세계대회 결승인 만큼 승부가 엎치락뒤치락해서 최종국까지 가야 흥행에 도움이 될 텐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상대인 왕시 5단은 안중에 없는, 자칫 오만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장담대로 끝났다. 감기로 컨디션이 안 좋은 이세돌 9단의 2대0 완승이었다.

 

평소 색깔 있는 행동으로 괴팍하다는 일부 평판도 듣고 있었던 이세돌 9단다운 일화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는 이세돌이 왜 강자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우선 이세돌 9단은 지피지기, 곧 자신을 알고 또 상대인 왕시 5단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승부의 결과를 족집게처럼 내다본 것이 그것이다. 이는 또한 이세돌 9단이 사전에 왕시 5단의 바둑을 연구해서 그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코 경적(輕敵)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뿐 아니라 이세돌 9단은 두 사람의 실력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지를 정확히 가늠하고 있었다. 감기로 컨디션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2대0으로 끝내겠다고 호언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다. 손자병법의 가르침대로 싸우다보니 이긴 게 아니라, 이길 줄 알고 싸운 것이다.

 

승부는 꼭 겨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아의 전력을 정확히 알면 싸우지 않아도 승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손자는 모공편에서 전쟁의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체크포인트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싸울지 말지를 아는 자가 승리한다.

둘째, 많고 적은 병력을 그에 맞게 다루는 자가 승리한다.

셋째,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쪽이 승리한다.

넷째, 싸울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자가 승리한다.

다섯째, 장수가 유능하고 임금이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이 말 뒤에 손자는 유명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을 덧붙여 놓고 있다. 이미 승패를 아는 데도 굳이 무모한 싸움을 벌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를 모르기에 알파고와 같은 막강한 적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고수는 쉽게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 함부로 주먹을 날리는 사람은 하수에 불과하다. 손자는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는 사람이 강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서도 적을 이기는 사람이 강자라고 가르친다. 모공편에 담긴 손자의 가르침을 좀 더 살펴보자.

 

“병법에서는 아군의 숫자가 적군의 10배가 될 때는 포위한다. 5배가 되면 공격하고, 2배가 되면 적군을 분산시킨다. 수가 비슷하면 최선을 다해 맞서고, 적이 더 많으면 도망가고, 그게 아니라면 싸우지 말고 지키기만 해야 한다.”

 

압도적으로 우세할 때만 성을 공격한다.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할 마지막 수단이다. 장수된 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공격에 나서서 병력의 3분의 1을 잃고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차라리 재앙이라는 게 손자의 가르침이다. 노자는 <도덕경> 68장에서 “장수노릇을 잘하는 사람은 힘자랑 하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쉽게 노하지 않으며, 잘 이기는 사람은 쉽게 겨루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강자는 쉽게 성내지 않으며, 쉽게 싸우지도 않는다.

 

이를 보여주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이야기가 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祁山)에 여섯 번이나 출정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싸움에 일체 응하지 않고 진지를 굳게 지키기만 했다. 원정길에 나선 제갈량이 속전속결로 나오리라는 것을 간파한 사마의가 장기전으로 맞선 것이다.

뾰족한 수가 없었던 제갈량은 사마의의 분노를 격발시켜서 싸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의에게 여자 옷과 장신구 등을 보내어 겁쟁이라고 조롱했다. 또한 ‘상방곡(上方谷)’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붉은 비단 끈으로 화초 한 다발을 묶어서 보내기도 했다. 전에 사마의가 상방곡에 매복했을 때 화공(火攻)을 당해 황급히 후퇴했던 일을 비웃은 것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장기전으로 대치한 지 100여 일만에 제갈량은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천하의 제갈량도 싸우지 않는 자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사마의처럼 쉽게 노하지 않고, 쉽게 싸우지 않는 자가 진정한 강자이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승리의 비결은 알고 보면 아주 쉽다. 이기고 싶으면 이기는 싸움만 하면 된다. 지피지기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지는 일도 없다. 인생에서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은 일시적 감정에 격발되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기 때문이다.

 

남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고, 이긴 뒤에 싸워라. 승리의 기회는 상대가 만들어주지만, 고맙게도 지지 않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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