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마니아 김태관의 '알파고시대의 인간학'
[바둑인문학 (5)] 영웅은 졌을 때가 아니라 끝났을 때 운다
  •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07.04 18:18
  • 댓글 0

영웅선읍(英雄善泣)=영웅은 잘 운다눈물은 패자들만의 것이 아니다승자들도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승리의 축배에는 땀이 반눈물이 반이다눈물이 승자를 만들고영웅을 만든다영웅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눈물은 0대5로 패했을 때 흘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승했을 때 흘리는 것이다.”

독설가로 알려진 주제 무리뉴 감독의 말이다. 축구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맡고 있는 무리뉴 감독은 가는 곳마다 우승을 일궈 ‘스페셜 원(special one)’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유럽의 3대 리그인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리그에서 우승을 일궈낸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리뉴가 늘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페셜 원’이 되기까지에는 남모르는 눈물의 골짜기도 지나야 했다. 2010년 11월 30일 리그 경기에서 그가 맡은 레알 마드리드가 라이벌 FC바르셀로나에 0대5로 대패한 것도 그중 하나다. 그때 무리뉴는 “눈물은 0대5로 패했을 때 흘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축구팬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다섯 골 차이의 패배는 무리뉴가 감독으로서의 축구인생에서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그 참패는 무리뉴에게 독이 아니라 약이었다. 경기 후 가진 인터뷰는 무리뉴가 왜 ‘스페셜 원’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슬프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다. 질 줄 알았고, 질만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 패배가 선수들 마음에 오래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무리뉴는 이렇게 덧붙였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에게 리그가 끝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강해져야 한다. 울지 말라. 눈물은 우승을 했을 때 흘리는 것이다. 0대5의 패배는 우리가 왜 훈련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경기는 끝났지만 싸움은 이제부터다.”

무리뉴는 남들이 울 때 울지 않았다. 그리고 패배를 패배로 끝내지 않았다. 그에게 눈물은 패했을 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이겼을 때 흘리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무리뉴는 우승의 고지에 올랐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영웅선읍(英雄善泣). 영웅은 울기를 잘한다는 말이 있다. 영웅이라고 눈물이 없을 리 없다. 다만 울어야 할 때를 알고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비는 눈물로 천하를 얻었다고 한다. 울기만 잘 울어도 천하영웅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사나이들은 특별한 순간에만 눈물을 보인다. 그들은 패배의 순간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린다. 졌을 때가 아니라 끝났을 때 비로소 감추었던 눈물을 밖으로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유명한 천하쟁패도 눈물로 막을 내린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승자인 유방도, 패자인 항우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물은 그 색깔이 달랐다.

초패왕(楚覇王)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사기>의 ‘항우본기’는 그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항우의 군대는 해하(垓下)에 보루를 구축했지만 군사는 적고, 양식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한(漢)나라 군대와 제후의 병사들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당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군이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楚歌)를 불렀다. 항우가 크게 놀라 말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저렇게 많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술을 마셨다. 항우는 우(虞)라는 미인을 사랑하여 싸움 중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옆에는 또한 추(騅)라는 준마가 있었는데 언제나 타고 다닌 말이다. 비감에 싸인 항우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는다

그래도 시운을 못 만나니, 명마 추가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말이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를 또한 어찌할거나!

(力拔山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항우가 이렇게 여러 차례 노래를 부르니 곁에 있던 우미인도 따라 불렀다. 사마천은 이때 “항우의 뺨에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泣數行下)”고 기록하고 있다. 산을 뽑을 만큼 힘이 세고, 온 세상을 덮을 만큼 기세등등했던 영웅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항우는 이렇게 눈물을 흘린 후 혼신의 힘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오강(烏江)에 이른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정장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결하고 만다. 무면도강(無面渡江), 면목이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겠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뜻을 같이한 8천여 명과 함께 강을 건너왔었는데, 무슨 낯으로 저 혼자만 살아서 돌아가겠느냐는 것이었다. 항우가 목을 찔러 자결하자 그의 시신은 공을 다투는 군사들에 의해 그나마도 다섯 토막으로 동강이 나는 비운을 맞는다.

한고조(漢高祖) 유방도 항우와 똑같이 ‘읍수행하(泣數行下)’ 즉 두 뺨에 몇 줄기 눈물을 흘렸다고 <사기>는 전한다. 그러나 유방이 눈물을 흘린 것은 자결을 택한 항우와 달리 천하를 제패하고 금의환향했을 때의 일이다. 고조 12년 10월에 유방은 고향인 패현(沛縣)에 들러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한고조본기’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조가 장안(長安)으로 돌아갈 때 패현에 들러 머물렀다. 고조는 패궁(沛宮)에다 주연(酒宴)을 차리고 옛날 친구들과 자제들을 초청해 마음껏 술을 마시도록 했다. 또 패현의 아이들 120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고조는 술이 거나해지자 축(筑)을 타며 직접 노래를 지어 불렀다.

 

큰 바람이 이니 구름이 날아오른다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어찌하면 용맹한 인재를 얻어 천하를 지킬 것인가!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대풍가(大風歌)’라는 노래다. 아이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니 유방은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한고조본기’는 이 대목을 “감개무량한 유방의 두 뺨에는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항우본기’에서와 똑같은 표현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방도 울었고 항우도 울었다. 천하의 패권을 겨룬 두 영웅이 마지막에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똑같은 눈물이지만 그 명암은 달랐다. 항우는 졌을 때 울었지만, 유방은 끝났을 때 울었다. 항우의 눈물은 비가(悲歌)로 얼룩졌고, 유방의 눈물은 대풍가로 이어졌다.

인생이 끝나는 것은 패배했을 때가 아니라 포기했을 때라는 말이 있다. ‘무면도강’을 들먹이며 강 건너기를 포기한 항우는 패배를 패배로 끝내고 말았다. 진짜 패배는 패했을 때가 아니라 포기했을 때 찾아오는 것임을 항우는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승리가 없듯이, 영원한 패배도 없다. 승리도 패배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승리 속에는 패배가 숨어있고, 패배 속에는 승리의 씨앗이 감춰져있다. 그래서 승리는 패배를 부르고, 패배는 승리를 낳는다.

<한비자> 유도(有度)편은 “영원히 강한 나라는 없고, 언제나 약한 나라도 없다”고 가르친다. 강자라고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며, 약자라고 늘 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강자는 늘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지지 않는 사람이다. 곧 져도 포기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패배마저도 이겨내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인 것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일본 현대바둑의 거목인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이 남긴 명언이다. 실력이 달려도 이기면 강자로 인정받는다. 어쨌든 이겨내는 것,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기타니 9단의 이 명언에는 그의 쓰라린 승부인생이 녹아들어 있다.

괴동(怪童). 기타니 미노루의 청소년시절의 별명이다. 소문난 천재 기사인 그는 발군의 실력으로 승승장구하며 당대 최고수의 자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괴동이 나타났다. 5세 연하의 또 다른 천재기사 오청원(吳淸原)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다.

한 하늘 아래 두 태양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기타니와 오청원 중에 누가 고수인가를 놓고 입방아를 찧었다. 세인들의 관심이 증폭되자 마침내 누가 더 센가를 가리는 치수고치기 10번기가 벌어졌다. 요즘 말로 끝장승부였다. 승패가 기울면 진 쪽의 치수를 내림으로써 상대보다 하수임을 자인하게 된다. 패자는 온 천하에 공개적으로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는 잔인했다. 치명적인 진검승부에서 기타니 미노루는 일방적인 성적으로 밀리고 말았다. 오청원의 라이벌에서 한 수 아래 하수로 전락했다. 실력은 엇비슷했지만 승부의 명암은 천국과 지옥처럼 달랐다.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은 기타니 미노루는 그 후 다시는 정상의 자리에 서보지 못했다. “이기는 자가 강자”라는 말에는 2인자라는 그늘 속에서 평생을 산 기타니 9단의 회한이 짙게 배어있다.

그러나 승부는 끝났어도 인생바둑은 끝나지 않았다. 운명은 또 하나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일의 역사는 기타니 미노루를 영원한 패배자로 남기지 않았다. 정상의 꿈을 접은 그는 기타니도장을 열었다. 그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해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고수들을 길러냈다. 기타니의 제자들은 온갖 타이틀을 휩쓺으로써 스승이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주었다.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바둑명가 기타니도장은 일본 현대바둑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국바둑의 대부인 조남철과 김인 전 국수, 조치훈 9단 등도 기타니도장 출신이다.

기타니 미노루는 라이벌 오청원과의 승부에서는 패했지만, 인생이라는 또 다른 승부에서는 영원한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좌절을 딛고 그는 마침내 패배마저도 이겨낸 것이다. 한때의 패배는 그에게 결코 끝이 아니었다.

강한 자라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약한 자라고 언제나 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기타니 미노루의 말처럼 이기는 자가 강자다. 패배를 패배로 끝내는 사람이 약자고, 패배에서 승리를 일구는 사람이 강자다. 진정한 강자는 패배마저도 마침내 이겨내는 것이다.

눈물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눈물만 있는 인생도 없다. 승리만 있는 바둑이 없듯이, 패배만 있는 바둑도 없다. 승부는 돌고 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특별한 순간까지는 눈물을 감춰라. 졌을 때 울지 말고 끝났을 때 울어라. 영웅은 울 때를 안다. 다들 울 때 홀로 울지 않을 수 있다면 그대는 영웅이 될 자격을 갖췄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는 사람은 패배를 패배로 끝내지 않는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저작권자 © 코리아뉴스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오늘의 뉴스
유해용 구속영장 기각한 허경호 판사 '과거 사례'
유해용 구속영장 기각한 허경호 판사 '과거 사례'
심재철 의원실 압수수색, 한국당 '야당탄압' 반발
심재철 의원실 압수수색, 한국당 '야당탄압' 반발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