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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 (3)] 오직 한 발이 바위를 꿰뚫는
  •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06.1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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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석위호(射石爲虎)’=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바위를 꿰뚫었다. 필사의 한 발이 바위를 뚫는 기적의 드라마를 만든다. 일수불퇴, 오직 이 한발이다.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오직 이 한 발의 화살이다.

최근 퇴진한 프로야구 김경문감독의 자필메모가 언론에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염력통암(念力通巖). 마음의 힘은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전승 우승을 이끌었던 명장의 체취가 묻어있는 한자성어다.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9회말 1사 만루 위기를 더블플레이로 탈출하며 짜릿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지금도 야구팬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벼랑 끝에서 필사의 각오로 나아가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가 뚫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얼결에 쏜 화살이 바위를 꿰뚫었다는 ‘사석위호(射石爲虎)’의 고사도 ‘염력통암’과 뜻을 같이한다. ‘사석위호’는 한(漢)나라의 명장 이광(李廣)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광은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난 맹장이었다. 변경의 태수로 있으면서 용맹을 떨쳐 흉노들 사이에서는 ‘비장군(飛將軍)’으로 통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하루는 이광이 사냥을 나갔는데 산속에서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어둑어둑한 숲길을 헤치며 돌아오는데 아뿔싸, 문득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이광은 재빨리 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렸다.

“휭~”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호랑이에게 명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화살에 맞았는데 호랑이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니, 왜 호랑이가 꿈쩍도 하지 않지?”

이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게 어인 일인가.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커다란 바위였다. 놀랍게도 이광이 쏜 화살은 바위 깊숙이 꽂혀 있었다.

“어허, 화살이 바위에 박히다니!”

기이하게 여긴 이광은 아까의 자리로 되돌아와 다시 화살을 날려 봤다. 그러나 이번에 쏜 화살은 바위를 뚫지 못하고 그냥 튕겨져 나왔다. 몇 번을 다시 쏴도 화살은 바위에 부딪쳐 화살촉만 부러질 뿐이었다. 처음에 필사의 각오로 쏜 그 화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 ‘이장군(李將軍)열전’에 나오는 고사다. ‘염력통암’이라는 말처럼 정신을 집중해 쏜 일발필사의 화살이 바위를 뚫는다. 두 번째로 쏜 화살은 바위를 뚫지 못한다.

인생도 오직 이 한 발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긴 인생길에서 기회는 무수히 많이 다가오지만,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바둑의 일수불퇴처럼 흘려버린 기회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한 기회는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쥐어진 오직 이 한 발의 화살이다.

맹장 이광은 사지에 몰렸을 때 기막힌 기사회생의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역시 ‘이장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광이 기병(騎兵) 100명을 거느리고 흉노족 세 명을 추격했을 때의 일이다. 흉노 둘을 죽이고 하나는 사로잡아 오는데 수천 기의 흉노족 군대와 맞닥뜨리게 됐다. 중과부적이라 목이 날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흉노 군대가 이광의 군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멈칫거렸다. 혹시 함정으로 끌어드려는 유인병들이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이다.

잔뜩 겁을 집어먹기는 이광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서 줄행랑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흉노 군대가 뒤로 물러나 산 위에 진을 쳤다. 때는 이 때라 이광의 군사들은 어서 줄행랑쳐야 한다며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이광의 입에서는 뜻밖의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거라!”

군사들이 의아해 하자 이광이 설명했다.

“우리는 본대로부터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도망치면 흉노들이 바로 추격해와 전멸 당하고 말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적진 쪽으로 더 전진해야 한다. 마치 유인병인 것처럼 행동해야 모두가 살 수 있다.”

이광의 기병들은 명령대로 전진하여 흉노의 진지에서 2리가량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이광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안장을 풀어라!”

기병들이 다시 깜짝 놀라서 말했다.

“적의 대군이 코앞에 있습니다. 만약 급습해 온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적들은 우리가 곧 도망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거꾸로 모두 안장을 풀어 놓아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저들은 우리를 진짜 유인병일 줄로 믿고 섣불리 치러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과연 흉노 군대는 쉽사리 쳐들어오지 못했다. 얼마 뒤 흉노 장수 하나가 군사 수십 기를 이끌고 나와 이광 군대의 동정을 살피려고 기웃거렸다. 이광이 쫓아나가서 흉노 장수를 사살한 뒤 돌아와 다시 태연히 말안장을 풀었다.

그러고 이번에는 더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에게 이제는 아예 누워서 잠을 자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광의 짐작대로였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는데도 흉노 군대는 의심에 사로잡혀 감히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라 되레 한나라 대군이 야습해올까 두려워 한밤중에 모두 철수해 버리고 말았다. 날이 밝자 이광의 군사들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본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광의 군사들은 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화살로 삼은 것이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대한 적진이 쪼개져 버렸다. 화살이 바위를 뚫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인생은 논리나 순리대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화살이 바위를 꿰뚫고, 계란이 바위를 깨뜨리는 기상천외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역전과 반전, 기적이 있어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묘미를 더한다. 인생의 축도라는 바둑도 마찬가지다. 벼랑 끝에서 사생결단으로 나아가면 기적 같은 대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승부사 조치훈 9단이 연출했던 대역전 드라마가 그것을 보여준다.

1983년 3월 17일 일본 도쿄 후쿠다야가(福田家)에서 벌어진 기성전(棋聖戰) 결승 7번기 제7국. 268수를 마지막으로 바둑이 끝나자 반상에는 기적의 드라마가 쓰여 있었다. 백 1집반 승. 백을 쥔 조치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맞은편의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은 믿기지 않는 듯 장탄식을 내뿜었다. 3연패 뒤 4연승, 벼랑 끝에서 펼쳐진 대역전 드라마였다.

애초에 기성전 결승 7번기를 앞두고 후지사와는 조치훈에게 이렇게 호언한 바가 있다.

“앞으로 네 판만 가르쳐 주겠다.”

후지사와는 평소에도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일본 최대기전인 기성전은 상금이 워낙 커서 네 번 이겨 타이틀만 지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후지사와의 입담에 도전자 조치훈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7번기의 뚜껑이 열리자마자 후지사와가 내리 3연승을 해서 조치훈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1승만 더 거두면 후지사와의 장담대로 승부가 끝날 판이었다.

그러나 남은 그 1승은 후지사와의 것이 아니었다. 막판에 몰린 조치훈은 한 판 한 판 이겨가더니 마침내 극적인 뒤집기에 성공했다. 세 판만 배우겠다던 조치훈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다.

올드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추억의 명승부다. 7번 승부에서 초반 3연패 뒤 4연승은 좀처럼 보기 힘든 역전극이다. 4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1903년 월드시리즈가 생겨난 이후 한 번도 그런 역전극은 없었다. 그 힘든 대역전 드라마를 조치훈 9단은 그 뒤로도 세 번이나 더 연출했다. 한 사람이 네 번씩이나 큰 타이틀매치에서 3연패 뒤 4연승을 기록한 것은 일본 바둑 사상 조치훈 9단이 유일하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그의 처절한 투혼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대기록이라고 하겠다.

기적을 연출하는 것은 언제나 오직 이 한 발이다. 화살이 많다고 고수는 아니다. 화살 세 개 가진 자가 한 개 가진 자를 못 이긴다는 속담이 있다. 화살이 세 개인 사람은 절박하지가 않다. “다음 화살도 있는데…”라는 느슨한 마음으로 쏘다보면 마지막 남은 한 발까지 빗나가기 십상이다.

반면에 화살이 한 개인 사람은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이 한 발을 놓치면 모든 게 끝이기 때문이다. 화살이 셋이면 마음도 셋으로 나뉘지만, 화살이 하나면 마음이 오직 한 과녁에만 집중된다. 그 한 발의 화살이 염력통천, 사석위호의 화살이다. “이 다음은 없다”라는 비장함이 벼랑 끝 위기에서 대역전을 일구고 기적도 낳는다.

일수불퇴는 바둑에서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음 기회는 없다. 인생은 언제나 지금이 마지막이다.

긴 인생길을 가다보면 호랑이도 만나고, 바위도 만나게 되는 법이다. 그 위기의 순간이 곧 기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인생의 벼랑 끝은 현실이 끝나고 초현실이 펼쳐지는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화살이 바위를 뚫는 기적을 보고 싶은가? 다음 화살은 잊어버려라. 오직 이 한발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라. 최후의 한 발이 바위를 뚫는다. 아니, 바위를 뚫는 것은 화살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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