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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은 방탄소년단의 뿌리다”
  • 오건(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18.06.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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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신중현.

대중음악계의 대장 신중현(80)이 그의 노래로 만드는 뮤지컬 <미인>의 제작발표회를 계기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대중음악계의 ‘대장’으로 표현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올해 50주년을 맞아 전국투어 콘서트를 펼치는 조용필보다 10여년 앞서 데뷔했다. 1968년 조용필이 미8군 무대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신중현은 독창적인 음악으로 미군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주둔해오던 미군들이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기타를 둘러매고 그들 앞에 서서 놀라움을 선사한 재키(때로는 히키)가 신중현이었다.

신중현은 미국이나 영국에 뿌리를 둔 팝음악을 흉내내는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이고 선구자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음악이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면서 신중현만의 독자성을 확보했다. 창작음악을 바탕으로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여러 편 생산되면서도 신중현의 주크박스 뮤지컬이 이제야 무대에 오른다는 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뮤지컬 <미인>(6월 15일~7월 22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 거는 기대는 뮤지컬의 완성도에 앞서 그의 노래들이 신세대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가 궁금해서다. 뮤지컬 <미인>은 1930년대 무성영화관을 배경으로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목으로도 쓰인 ‘미인’을 비롯해 ‘아름다운 강산’ ‘봄비’ ‘커피 한 잔’ ‘꽃잎’ ‘빗속의 여인’ ‘리듬 속에 그 춤을’ 등 신중현이 만든 23곡이 등장한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미인) 그의 노랫말은 단순하다. 그냥 얘기하듯이 반복한다. ‘미인’뿐만 아니라 다른 노래들도 단순한 기타 코드로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주 오래전에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전율이 지금도 감지될 정도다. 지금도 그의 노래들이 전혀 낡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의 진보적인 음악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김추자, 펄시스터즈, 김정미 등 신중현사단의 싱어들

1970년대 신중현이 만든 노래를 바탕으로 생산된 가수들을 통칭 신중현 사단이라고 부른다. 미8군 무대에서 서양의 록과 재즈 등을 다양하게 수혈한 신중현이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한 음악을 발판으로 데뷔시킨 가수들을 통칭하여 그렇게 부른다. 신중현 사단의 첫테이프는 그를 리더로 하여 결성된 록그룹 애드 훠(Add 4, 1964)가 끊었다. 화려한 사이키델릭록을 바탕으로한 에드 훠의 노래는 소위 뽕짝으로 부르는 트로트가 주도하던 이전의 노래들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명곡의 반열에 오른 ‘빗속의 여인’을 발표했지만 팬들은 냉담했다. 트로트에 길들여졌던 기성세대는 물론 팝송에 매료됐던 젊은 층들에게도 신중현의 음악은 너무 앞서갔던 것이다.

이후 신중현은 생계를 위해 미8군 등의 무대에 서기 위해 싱어로 활동할 여가수를 찾았다. 이정화, 김추자, 김정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신중현이 종로5가의 한 살롱에서 만나 데뷔시킨 이정화는 옐로보이스가 인상적인 여가수였다. 신중현이 소위 사이키델릭록을 앞세워 ‘봄비’‘꽃잎’등을 담아 발표(1967년)했지만 대중성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했다.

신중현을 세상에 알린 첫 히트작은 1968년 펄시스터즈의 '님아!'다. 신중현에게 편곡을 부탁하고자 찾아온 펄시스터즈(배인숙, 배인순 자매)는 그에게 음악 이론과 창법을 사사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던 당시 신중현은 베트남 미군기지 공연 모집에 지원, 펄시스터즈와의 작별을 앞두고 '님아!' '커피 한잔'이 수록된 음반을 취입했다. 그러나 신중현은 이 음반이 히트하면서 베트남행을 포기했다. 펄시스터즈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탄력있는 몸매로 TV에 출연, 파격적인 안무까지 선보이면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 등장한 김추자와 김정미는 한국 여가수 계보에서 빠질 수 없는 신중현 사단의 보물이었다. 또 이들이 낸 앨범 역시 신중현 음악 중에서 손꼽을만한 명곡들을 담고 있다. 김정미는 고3시절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신중현 사무실에 갔다가 인연을 맺었고, 김추자는 신중현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가수를 시켜달라고 조른 끝에 음반을 냈다. 김추자는 1970년 패티김이 취입하기로 돼있던 라디오 주제가 ‘님은 먼곳에’를 펑크내는 바람에 가수로 데뷔했고, 김정미는 1971년 소위 소주병 난사사건으로 리사이틀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김추자를 대신하여 처음 무대에 올랐다.

김정미의 앨범 <NOW>와 <바람> 등에 실린 노래 '봄' '바람' '햇님' '어디서 어디까지' 등은 지금 들어도 손색이 없는 명곡이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김추자는 상황이 달랐다. 김추자의 음반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나뭇잎이 떨어져서’‘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은 대중적인 인기를 업고 크게 히트했다. 흑인풍의 퍼머머리에 소위 나팔바지를 입고 다이내믹하게 노래를 부르던 김추자는 시대의 패션 트렌드까지 바꾸면서 종횡무진했다. 당시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까지 돌 정도였으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신중현 사단'의 전성시대에 등장한 또 한 명의 가수는 장현(작고)이었다. 매력적인 중저음의 보이스칼라를 가졌던 장현은 신중현의 곡을 받아 '미련' '기다려주오' '석양' 등의 노래를 잇달아 히트시켰다. 최근 인기를 얻었던 세시봉 세대의 가수들과 함께 신중현 사단의 가수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흔들면서 승승장구했다.

한국적인 흥 담아낸 ‘미인’ 탄생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였던 신중현은 본인이 결성한 밴드로도 70년대 대중음악 판도를 뒤흔들었다. 신중현은 1973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 '미인' 등의 히트곡을 낸다. 그가 만든 노래들은 단순히 서양의 록음악을 흉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가락을 접목시켜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록그룹을 하면서 늘 우리네 정서에 녹아있는 한국적인 흥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각설이타령’을 듣다보면 슬픔 속에서도 풍자를 담아내서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여유가 느껴지거든요. 서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흥과 가락을 록 속에 녹여내는 작업 끝에 ‘미인’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졌죠.”

앨범 속에서 신중현은 서양에서 들어온 기타로 5음계만을 써서 경쾌한 기타 리프로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냈다. 미8군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야전에서 닦아온 기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이 단숨에 한국 록의 역사를 바꿨지만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애드포, 덩키스, 더맨 등의 밴드를 결성하여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른두 살의 젊은 아티스트 신중현에게 가장 큰 불만은 팝을 우대하고 우리 가요를 천시하는 가요계 풍조였다.

“70년대만 해도 ‘엽전들이 뭘 하겠냐?’는 자조적인 표현이 만연했어요. 그래서 ‘내가 엽전이다. 엽전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그룹 이름을 지었죠. 또 엽전은 곧 돈이고, 그 생김이 참 예술적이잖아요. 서양돈과 달리 엽전은 한국적인 느낌도 강해서 제가 하려는 음악과도 잘 맞았죠.”

그가 영어식 그룹 이름을 버리고 결성한 엽전들에 베이스 이남이와 드럼 김호식을 영입한다. 그리고 지구레코드에 150만원을 받고 1년6개월간 전속가수가 된다. 그러나 신중현이 만든 노래들은 레코드사 대표인 임정수의 고개를 젓게 만든다. 러닝타임이 5분에 가까운 ‘미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너무 길었고, 가요제작자도 소화하기 힘든 리듬과 멜로디를 담고 있었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매품 1,000장만 찍었다. 이 비매품은 지금 LP시장에서 1백만원을 호가한다. 정식 발매된 1집은 드러머 권용남을 새로 영입한 뒤 러닝타임도 줄이고 내용도 수정해서 내놓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팔려나갔다. 노랫말처럼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은 앨범’이 됐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자꾸만 먹고 싶네’로, 구두닦이는 ‘한 번 닦고 두 번 닦고 자꾸만 닦고 싶네’ 등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까지 등장했다. 이 앨범의 수록곡들은 모두 범상치 않았다. ‘미인’을 비롯하여 그루브한 진행이 돋보이는 ‘그 누가 있었나봐’와 ‘긴긴밤’, 펑크한 느낌을 담은 ‘생각해’ ‘저 여인’, 7분여의 사이키델릭풍의 곡 ‘떠오르는 태양’ 등 명곡들이 이 앨범에 수록됐다.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달리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예륜’(예술윤리위원회)은 신중현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또 허름한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구사하는 그들이 혐오감을 주고,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게다가 그 시절은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내려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신중현은 항복 선언(?)을 한다. 2집 앨범 수록곡이 이유도 없이 음반심의에 걸리자 장발을 자르고 건전한 내용의 노래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요사에 길이 남은 2집 앨범(75년 10월) 재킷사진이다. 세 명의 멤버가 고궁을 배경으로 단정한 머리에 정장차림으로 도열하여 근엄한 표정으로 45도 위를 바라보는 재킷사진은 항복선언이 아닌 독재정권에 감자를 먹이는 유쾌한 풍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은 75년 12월 가수 김추자, 같은 그룹 멤버 권용남과 함께 대마초가수로 낙인찍혀 구속되고 만다.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고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건전가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한 대가였다.

신중현과 그의 사단들은 그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장발과 통기타, 청바지 문화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발아기에 대마초 사건은 정치적인 탄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 학살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창 꽃피기 시작한 신중현 음악의 발을 묶고 손을 자르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한국대중음악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만약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신중현은 그냥 불운한 한 시대의 천재가 되어 박제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김추자와 김정미 등 좀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발군의 여가수들이 채 피지도 못한 채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신중현이 감옥으로 가지 않고 좀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지형도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방탄소년단과 신중현 사단의 공통점

이제는 ‘케이팝’이 한국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말이 됐다. 모든 한국의 대중음악을 케이팝이라고 부르는 데는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전 세계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향유하는 팬들은 케이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방탄소년단(BTS)의 새 앨범이 빌보드 200에서 1위에 오른 사건은 한국 케이팝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1위에 오른 타이틀곡 ‘페이크 러브’(Fake Love)는 한국어로 된 노래이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7명의 멤버들은 이제 팝의 종주국인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 오대양 육대주에 있는 10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세계적인 그룹이 됐다.

한국의 기성세대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방탄소년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그룹이다. 그들을 프로듀싱한 제작자 방시혁(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비주얼적으로 아름답고, 음악이 총체적 패키지로 작용하고, 무대 퍼포먼스가 멋있는 케이팝의 본질에 충실했다”고 성공이유를 밝힌 바 있다. 방시혁 역시 1994년 서울대 미학과 재학시절 유재하가요제에서 입상한 이후 수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온 싱어송라이터이다. 아니 제대로 가수로서 큰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셈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들으면서 묘하게도 신중현과의 유사점이 한둘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방탄소년단의 노랫말은 쉽고도 간결하다. 신중현의 노랫말이 그랬듯이 10대와 20대들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한 번 보도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미인처럼 방탄도 스무살의 내 삶이 가진 고민을 반복적인 방법으로 풀어놓는다. 또 신중현이 그랬듯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우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건 누구?/ 일등이 아니면 낙오로 구분’(‘N.O’)하는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둘째, 신중현이 그랬던 것처럼 방탄은 종주국의 팝음악을 원용하여 한국화 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방탄의 음악을 관통하는 비트를 자세히 들어보면 마치 신중현의 음악에 도도하게 흐르는 한국적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노랫말도 모르면서 전 세계의 10대들이 열광하는 이면에는 그동안 그들이 들어왔던 팝음악과는 구별되는 뭔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걸 다른 말로 설명하면 우리 대중음악을 지배해온 ‘뽕끼’가 방탄의 음악 전반에 흐르고 있다. 방탄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칼군무야말로 신중현이 창조한 한국적 록음악의 신명나는 리듬감과 다를 바가 없다. 신중현이 엽전들이 뭘 하겠느냐는 편견과 싸웠듯이 방탄도 전 세계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우수한 ‘엽전’들인지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탄도 신중현처럼 모두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이다. 춤과 노래, 작사실력, 작곡실력은 물론 글로벌 활동에 필수적인 언어능력도 갖췄다. 아티스트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신중현의 시대에 SNS 같은 우수한 홍보 매체를 갖고 있었거나 전 세계를 상대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가 비틀즈의 존 레논과 비견되는 가수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비틀즈가 탁월한 그룹임에는 틀림없지만 신중현이 꿈꿨던 음악세계 역시 비틀즈 못지 않는 독창성과 탁월함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80대 음악대장의 끝나지 않은 도전

여하튼 비틀즈가 서양 팝음악 역사의 분기점이자 정점에 있었다면 한국 대음악사의 정점이자 분기점에는 신중현이 있었다. 한국 대중음악은 신중현 이전의 음악과 신중현 이후의 음악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여명기 한국대중음악은 신중현으로 인해 눈 뜨고, 신중현으로 인해 발아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 세계 음악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60년대 한국 땅에도 신중현과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있었다는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앞으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적어도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겐 큰 관심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신중현은 얼마전 한국 최초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부인 명정강을 지난 3월 떠나보냈다. 그는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음악 작업을 쉬고 있었다”는 그는 몇 년 전부터 기타리스트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음악작업을 하고 있다. 일단 올가을을 목표로 둘째 아들 신윤철, 셋째 아들 신석철과 함께 새 앨범을 준비 중이다. 앨범 주제는 ‘헌정기타 기념음반’이다.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 펜더로부터 2009년 아시아인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커스텀 기타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 기타는 펜더가 음악인의 특징을 살려 제작한 세계에서 단 하나 뿐인 기타로 에릭 클랩튼·제프 벡 등 전 세계에서 단 6명만이 갖고 있다.

어쩌면 신중현의 새앨범이 빌보드에서 방탄소년단의 그것과 겨룰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오건은 대중문화 주변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신명 나게 사는 딴따라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만든 콘텐츠들을 좋아하고 지지한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날까지 글을 통해 비판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오건(대중문화평론가)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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