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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인문학 (2)] 양귀비 요술에 속지 마라
  •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05.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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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幻者能眩 實觀者自眩= 요술쟁이가 속이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스스로 속는 것이다. -<열하일기> 환희기 ▶살찐 양귀비가 절세가인으로 보인 것은 당 현종의 눈이 스스로 홀린 까닭이다.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요지경 같은 세상, 눈으로 보았다고 다 믿어서는 안 된다. 하수들은 헛것에 홀려 인생을 날리기 일쑤다. 눈이 어두우면 인생이 어둡다.

 

1780년 8월, 중국 청나라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熱河). 이른 아침인데도 저자거리는 탄성과 고성, 웃음소리로 북적거렸다. 패루라는 곳에 모인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다. 콩나물처럼 빼곡한 인파 한 가운데에서는 요술쟁이가 한창 신비한 환술(幻術)을 시연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구경꾼들에게 내보인다.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모아 비비니 신기하게도 좁쌀알갱이만한 게 생겨났다.

계속해서 비비자 점점 커져 녹두알 만해지더니, 점점 커져서 앵두 만해졌다가 달걀만큼 커졌다. 이에 양손으로 더욱 빠르게 비비며 돌리니 더 둥그렇게 커졌는데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 같았다. 그러더니 그것이 삽시간에 수박 만해졌다.

요술쟁이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점점 위로 향하며 계속 비벼대니, 이윽고 장구만해지자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것의 모양은 둥글고, 빛깔은 샛노란데다 크기는 다섯 말들이 물동이만 했다. 돌도 아니고 쇠도 아니며, 나무나 가죽은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흙으로 빚은 것도 아닌데 무겁고 단단한 것이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요술쟁이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다시 그 물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연약한 물건을 만지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점점 오그라들어 순식간에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다시 양손가락으로 살살 비비다가 한 번 손가락을 퉁기니 마침내 휙 사라져버렸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환희기(幻戱記)’에 소개된 요술 장면이다. 건륭황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따라가서 중국 땅을 처음 밟은 연암은 온갖 기이한 풍물을 접했다. 시장거리에서 만난 연희패들의 환술, 즉 마술도 그 중 하나였다. 일찍이 보지 못한 신기한 구경거리에 감탄한 연암은 <환희기>에 요술 스무 가지를 생생히 그려놓았는데, 그 중에는 복숭아 열매에서 가지가 돋고 꽃이 피어나는 요술도 있다.

 

요술쟁이가 탁자 위를 깨끗이 닦고 도서를 진열하고는 조그만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흰 유리쟁반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았다. 탁자 앞에 바둑판과 바둑알 통을 놓고 돗자리를 단정하게 깔아놓고는 잠시 휘장으로 탁자를 가렸다가 휙 하고 걷어내니, 이게 웬일인가? 거짓말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이한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는데, 구슬로 만든 관을 쓰고 연잎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신선의 옷과 신발을 걸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지팡이를 짚은 채 옆에서 구경하는가 하면 턱을 고이고 조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은 예스럽고 기이했다.

잠시 뒤 쟁반에 있던 복숭아에서 홀연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생기더니 가지 끝에 꽃이 피었다. 구슬 관을 쓴 사람이 복숭아 한 개를 따서 나누어 먹고는 그 씨를 땅에 심었다. 그러고는 또 다른 복숭아를 따서 절반도 채 못 먹었는데, 땅에 심었던 복숭아가 자라기 시작해서 금세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그러자 바둑 두던 사람의 머리가 갑자기 반백이 되더니 순식간에 눈처럼 하얗게 세어버렸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몰랐다는 ‘난가(爛柯)’의 전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술이다. ‘난가’는 바둑의 별칭으로 ‘썩어 문드러진 도끼자루’라는 뜻이다. 청나라 때 고빈(高斌)이 지은 <술이기(述異記)>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에 왕질(王質)이라는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에서 나무를 하던 그는 평소에 가보지 않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웬 동자 둘이 나무그늘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왕질이 다가가 바둑판을 구경하니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했다.

왕질은 나무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옆에 앉아서 구경했다. 그러다가 문득 허기를 느꼈는데, 바둑을 두던 동자 하나가 주머니에서 귤 비슷한 걸 꺼내더니 먹으라고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열매를 한 입 깨무니 배고픔이 싹 달아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바둑이 끝나자 왕질은 집에 돌아가려고 옆에 놓아두었던 도끼를 찾았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도끼날은 그대로 있는데 도끼자루가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진 왕질에게 동자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버렸다고 일러주었다.

정신이 번쩍 든 왕질이 부리나케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을은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고 전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왕질의 집에서는 웬 낯선 사람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며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왕질이 까닭을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 집 주인의 조상 중에 왕질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오. 아무리 찾아도 종적을 알지 못해 할 수 없이 오늘을 제삿날로 삼았다오.”

산에서 본 두 동자는 신선으로, 바둑 한 판을 두고 나니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딴 세상에 홀려 있었으니 신선들의 바둑놀음은 곧 요술이었던 셈이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요술쟁이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들려준다.

“요술이 환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들고, 어제의 부자가 오늘은 가난해지며, 홍안의 청년이 갑자기 백발이 되어 나타나니 세상만사가 마치 요술과 같다. 죽거나 살거나, 있거나 없거나 하는 일들 가운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요술은 요술쟁이들만 부리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이 바로 요술이고, 인생이 허깨비 장난과도 같다. 일장춘몽이라는 인생은 어느 날 깨어 보면 요술처럼 머리가 희어져 있고, 사람도 강산도 변해 있다.

 

연암은 함께 요술을 구경한 중국 관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속으니 눈이란 참 믿을 수 없군요. 요술쟁이가 우리를 속인 게 아니라 보는 사람 스스로가 눈이 어두워져 현혹되는 것입니다(非幻者能眩 實觀者自眩).”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광명한 눈이나 참된 바라봄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중국 관리는 이어서 실제 역사 속에서 펼쳐진 요술의 사례들을 열거했다.

“사람들은 조비연(趙飛燕)은 너무 말랐고, 양귀비는 너무 살쪘다고 말합니다. ‘너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두 여인은 절세가인은 아니었던 게 분명합니다. 다만 그 여인들한테 반했던 임금들이 요술에 홀렸던 것이지요.”

천하절색이라는 양귀비와 조비연도 따지고 보면 눈이 속은 것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사람의 눈이란 믿을 수 없어서 어떤 때는 양귀비처럼 통통한 여자가 미인으로 보이고, 어떤 때는 조비연처럼 비쩍 마른 여자가 예뻐 보인다. 그런데도 임금을 홀려서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니 너무도 기막힌 요술인 셈이다. 중국 관리는 역사 속에서 있었던 요술 사례들을 여럿 들먹였다.

“자객 예양(豫讓)이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켜 목소리가 변하게 꾸민 것은 의리라는 요술이요,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유방인 양 꾸며서 유방이 도망치도록 한 것은 충성이라는 이름의 요술입니다. 환관 조고(趙高)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요술을 부렸고, 맹상군은 닭 울음으로 사지에서 탈출하는 요술을 부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갈공명은 나무로 만든 소를 말처럼 달리게 하는 요술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요술은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일과 덕이 없는 자가 덕이 있는 체 하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연암도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것은 입으로 칼을 삼키는 요술보다 더 끔찍한 일이지요!”

 

‘소리장도(笑裏藏刀)’, 즉 웃음 속에 품은 칼은 간신들의 전유물이다. 연암은 그날 공중에 던진 칼을 입으로 삼킨 뒤 피가 뚝뚝 묻은 채로 배에서 꺼내는 엽기적인 요술도 보았는데, 그런 것보다 간신들의 웃음이 더 섬찟하고 말한다. 멀쩡한 사람들을 홀리는 간신들의 술수는 눈속임 요술보다 더 무섭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요술보다 더 기막힌 일들이 예사로 벌어져 헛것에 홀리고 거짓에 속아 인생을 날리기 일쑤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술쟁이의 요술은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현실 속의 요술은 속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속는 줄도 모르고 속으니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요술은 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요술에 홀려버린 사람은 되레 멀쩡한 사람을 핍박하기까지 한다.

 

서기 121년 정월 초하룻날, 한나라의 궁중에서 신기한 요술 쇼가 펼쳐졌다. 대륙 서남쪽에 위치한 이탄(夷彈)이란 나라의 제후가 음악과 요술을 하는 사람들을 보내와 안제(安帝)와 신하들이 함께 구경한 것이다.

요술쟁이는 입에서 불을 뿜는 등 신기한 연기로 사람들의 감탄을 샀다. 다들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분위기였는데, 간의대부 진선(陳禪)이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 간언을 했다.

“황궁의 뜰에서 오랑캐의 기예를 펼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이런 재주는 사람들을 미혹시킬 뿐이니 어서 물러가게 하옵소서.”

이 말이 여러 사람의 분노를 일으켰다. 한 신하가 핏대를 올리며 안제에게 진언했다.

“진선은 조정을 비방하고 황제를 업신여겼으니 당장 하옥해야 마땅합니다.”

옆에 있던 신하들도 중벌을 내리라고 맞장구를 쳤다.

“진선은 흥겨운 분위기를 깼을 뿐만 아니라 폐하까지도 우매한 군주로 깎아내렸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중죄입니다.”

안제는 죽을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평소 진선의 충직한 행동이 눈에 거슬렸던 터라 이를 빌미로 변방의 외직으로 쫓아내 버렸다. 모두가 환술에 홀리면 깨어 있는 멀쩡한 사람만 바보가 된다. 요술 구경을 둘러싸고 간신이 충신이 되고, 충신이 눈엣가시가 되는 진짜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난 셈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는 요술처럼 기막힌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대개가 보는 사람의 눈이 어두워져서 스스로 속은 것이다. 눈이 어리석음으로 가려지니 추녀가 미인으로 보이고, 간신이 충신으로 비쳐진다. 연암은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 것”이라고 했다. 속이는 사람보다 속아 넘어가는 눈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아 넘어간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보는 눈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다가 낭패를 당한다. 물고기가 멀쩡히 눈을 뜬 채로 미끼를 무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에 고수는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참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사술이 판치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의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바르게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눈이 어두우면 인생이 어두운 법이다.

세상은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요술과도 같다. 그럴 듯하게 보일수록 더욱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눈이 어두우면 헛것에 사로잡혀 인생을 망치게 된다. 양귀비의 요술에 속지 마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도끼자루는 썩어 있고, 그대의 인생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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