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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광개토태왕> 1부11장 자객의 무리 - 4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② - 11장 자객의 무리
  • 엄광용 작가
  • 승인 2018.01.1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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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상 을두미는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한동안 고뇌에 잠겼다. 방금 전 서문 수문장이 그것을 가지고 왔다. 그는 새벽에 누군가가 문루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거기에 종이 두루마리가 묶여 있었다고 했다.

‘荊軻逆水’

네 글자를 본 순간, 을두미는 수문장에게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라고 단단히 일렀다.

수문장이 돌아가고 나서 을두미는 그 네 글자에 담긴 속뜻을 풀기 위해 골몰하였다. 형가(荊軻)는 저 한나라 때의 사가(史家)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유명한 자객 이름이었다. 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 연(燕)나라 태자가 보낸 자객으로 진(秦)나라 왕 정(政, 진시황)을 죽이러 가기 위해 역수(易水)에서 결의를 다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것을 일러 ‘역수가(易水歌)’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역수(易水)의 ‘역(易)’ 자가 두루마리의 글자에선 ‘역(逆)’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逆)’은 반역을 뜻하므로, 대왕 구부가 국내성을 비운 상태에서는 왕제 이련이나 왕손 아기씨인 담덕이 그 표적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흐음!”

을두미의 입에서는 저절로 그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쥘부채로 탁상을 두드리며 심사숙고를 하던 끝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왕손이 위험하다.’

이렇게 판단한 을두미는 종이 두루마리를 소매 속에 넣고 부지런히 왕제 이련이 있는 동궁전으로 향했다.

종이 두루마리에 문제의 네 글자를 적에 보낸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 네 글자에는 극비를 요한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이 분명했다. 웬만큼 학문이 깊지 않고서는 그 네 글자에 숨어 있는 뜻을 이해할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비밀을 요한다는 뜻이었다. 그 익명의 비밀 서찰은 바로 국상인 그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 분명하였다.

‘대체 누구일까?’

을두미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국상께서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시오?”

동궁전에서 을두미가 왕제의 알현을 청하자, 이련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때마침 동궁빈 하씨도 곁에 있었다.

“잠시 주위를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을두미는 누가 들을까 염려되어 작은 소리로 이련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동궁빈 하씨는 얼른 길례에게서 왕손 아기씨 담덕을 받아 안으며 눈짓을 보냈다.

길례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을두미는 왕제 이련이 안내하는 탁자에 가서 마주 앉았다. 왕제 옆에 아기를 안은 동궁빈 하씨도 자리했다.

“국상,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수곡성에서 어떤 소식이 왔습니까?”

이련이 을두미를 근심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왕제 전하! 우선 이것을 읽어보시지요.”

을두미는 소매 속에 간직하고 온 종이 두루마리를 이련에게 건넸다.

이련은 얼른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네 글자를 읽었다. 동궁빈 하씨도 곁눈으로 읽고 금세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얼굴색이 변하였다.

“흐음, 어떤 자들인지 모르지만 대왕 폐하가 없는 틈을 노리고 있는 것 같군요.”

이련은 을두미를 바라보았다가 그 눈길을 그대로 동궁빈 하씨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동해 고도에 위배된 명림수부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 단초를 제공한 모양입니다. 좀 더 두면 그곳에서 곧 세상과 이별하게 될 사람을, 신이 너무 서두둘러 사약을 내리게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는군요.”

을두미의 말에 이련이 곧바로 뒤를 달았다.

“국상께서는 연나부 세력을 의심하시는군요?”

“달리 의심할만한 세력이 없질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명림수부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조만간 자객을 보낼 것입니다. 그 전에 왕손 아기씨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물론 왕제 전하와 동궁빈 마마께서도 방심해선 안 될 문제이옵니다.”

을두미의 말에 동궁빈 하씨는 안고 있던 아기를 더욱 가슴 가까이 끌어당기며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연나부 세력이라면, 딴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련은 여러 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동궁빈 하씨는 을두미와 이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들의 음모를 미리 알았으니까, 철저하게 대비하면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우선 궁궐 경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신이 태학의 유생들 중 무술에 뛰어난 자들을 골라 궁궐 곳곳에 숨겨 두겠습니다.”

을두미는 국상이면서 태학의 최고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특히 태학의 유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일은 그가 전적으로 도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국상께서 그리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도 비밀리에 궁궐 밖으로 사람을 보내 무술도장에 있는 유청하를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유청하라면?”

이련의 말에 을두미가 눈을 빛냈다.

“지난 번 명의 살해 사건 때 죽은 기찰포교의 동생이 유청하입니다. 사실 그동안 나는 알게 모르게 유청하가 무술을 배우는 도장에 도움을 주고 있었지요. 나중에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리한 것인데, 마침 잘 되었네요. 유청하에게 도움을 청하면 날랜 청년 무사들 십여 명은 바로 동원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비밀리에 입궁시켜 이곳 동궁전 주변에 매복해 있도록 하면 자객의 침투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전하,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기밀을 요해야 하옵니다.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입궁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군사들을 이끌고 매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는 것처럼 꾸며, 그들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궁궐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이련의 이 같은 계획을 들은 을두미는 일단 안심하고 동궁전을 나섰다.

궁궐은 예나 다름없이 조용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궐내의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도록 하면서 자객의 출몰에 대한 대비책을 다 세워놓았다.

을두미의 거처는 태학의 박사들이 머무는 곳에 있었다. 국상이 되고 나서도 태학에서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가족이 없었으므로 저택이 필요치 않았고, 또 숙식을 비롯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태학의 숙사가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왕 구부가 수곡성을 치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간 다음부터 을두미는 태학의 숙소를 이용하지 않고 정무를 보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궁궐을 비운 대왕을 대신하여 국가 정사를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동궁전에서 돌아온 을두미는 태학에 들러 무술이 뛰어난 유생들을 가려 뽑아 궁궐 곳곳에 배치하였다. 동궁전뿐만 아니라 정무를 보는 정전 주변에도 매복해 있도록 하였다.

그날 밤, 을두미는 대신들이 다 퇴궐한 뒤에도 정전에서 서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바로 사마천의 『사기』 중 인물열전 자객편에 나오는 형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형가가 역수를 지나다가 읊었다는 ‘역수가’는 이러하였다.

 

風蕭蕭兮 易水寒

壯士一去兮 不復還

探虎穴兮 入蛟宮

仰天噓氣兮 成白虹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역수의 강물은 찬데

사나이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교룡궁으로 들어간다

하늘을 우러른 큰 외침이여, 흰 무지개 이루었다

 

을두미는 이 ‘역수가’를 몇 번이고 거듭하여 읽었다. 그러면서 새벽에 화살에 밀서를 붙들어 매 날려 보낸 자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연나부와 어떤 연결의 끈을 갖고 있는 자일 터인데, 그가 왜 사전에 그들의 음모를 알려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궁궐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찔러본 것이라면 저들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을두미는 분명 밀서를 보낸 자는 적군이 아닌 우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수가’를 다시 한 번 읽다가 교룡 ‘교(蛟)’ 자와 흰 ‘백(白)’ 자에 가서 그의 눈이 머물렀다. 교룡은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을 의미하는데, 머리는 작고 목둘레에 흰 띠가 있다고 전하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역수가’를 읊으며 장부의 기개를 내세운 자객 형가는, 그러나 진왕을 죽이는 데 실패하였다. 진왕은 교룡이 아니었다. 그는 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룡 궁이라? 흰 무지개를 이룬다? 교룡 궁이 동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흰 무지개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교룡의 목에 걸린 흰 띠가 무지개처럼 붉게 물든다? 교룡의 목이 떨어진다는 뜻인가?’

을두미는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다 말고 손이 목 부분에 가서 저절로 멈추었다. 그때 그는 문득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혹시 저들이 연나부 세력이 맞다면 왕손뿐만 아니라 내 목숨까지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명림수부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라면, 나도 저들의 목표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래, 잘 생각해 보자. 이것을 역이용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을두미는 한동안 맞은편 벽을 주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릎을 치며 일어섰다. 그는 정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유생을 불렀다.

“거기, 정호(正鎬) 있느냐?”

을두미의 부름에 유생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금 너는 즉시 정전 주변에 있는 유생들을 데리고 동궁전으로 가거라. 기민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정전을 비우고 동궁전의 경비를 더욱 강화한다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이쪽의 움직임이 드러나도록 하라.”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정호’라고 불리는 유생은 을두미의 명령대로 즉시 행동에 옮겼다. 그는 유생들 중에서도 가장 무술이 뛰어나서 특히 을두미가 아끼는 인재였다.

유생 정호가 나가고 나서 을두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장점을 뽑아 등불에 비춰보았다. 예리한 칼날이 불빛에 번뜩였다.

동궁전에 유생들을 재배치하고 돌아온 정호가 을두미에게 와서 보고하였다.

“분부대로 거행하였습니다.”

“잘 했다.”

을두미는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으며 정호를 쳐다보았다.

“그러하온데, 이곳 정전의 경비를 소홀히 해도 괜찮겠사옵니까?”

정호가 사뭇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저들에게 허를 보여주자는 것이야. 저들이 동궁전으로 집중시키려는 전력을 정전 쪽으로 빼돌려야 해. 이곳 정전은 나 혼자 지키겠다.”

“그러하면 스승님께서 위험하시지 않사옵니까?”

“나는 다 늙었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

을두미는 껄껄대고 소리 내어 웃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이곳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스승님의 신변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자네도 동궁전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저는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정호는 국상 을두미가 자신을 희생하여서라도 동궁전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승 을두미의 무술 실력을 굳게 믿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제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어쩌면 매우 위험한 전략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주겠느냐?”

“네,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정호야, 그럴 필요까진 없느니라. 목숨은 소중한 것이야. 너는 장차 우리 고구려를 위해 할 일이 많아. 그러니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무리를 해선 안 돼!”

을두미의 눈길이 정호의 눈과 마주쳤다. 정호는 그 눈길 속에 무한한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광용 약력>

-1954년 경기도 여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벽 속의 새」가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장편소설 『황제수염』, 『사냥꾼들』, 『꿈의 벽 저쪽』, 『사라진 금오신화』 등이 있음.

-2015년 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류주현문학상 수상.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novelky

엄광용 작가  koreanewstimes@kn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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