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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광개토태왕> 1부2장 싹트는 연정 - 31부 광야에 부는 바람 ① - 2장 싹트는 연정 
  • 엄광용 작가
  • 승인 2017.10.0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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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대곤으로부터 친부인 무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해평은 고구려 대왕 사유와 왕자 이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가촌에서 처음 대왕을 알현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때 분명 대왕 사유는 해평을 보고 낯이 많이 익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대왕은 해평이 왕제 무를 쏙 빼어 닮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대왕은 해평에게 대부가 되고, 왕자 이련은 사촌동생이 되는 셈이었다.

‘너는 고구려의 피를 이어받았다. 장차 고구려를 위해 네 한 몸 바칠 수 있겠느냐?’

해평은 친부인 무가 당부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생생한 기억은 마치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실제 육성으로 들려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밤중이었고, 하늘에는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불룩한 배를 내밀며 빠져나와 대지를 환하게 비추었다.

“아버님!”

해평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불과 십여세 밖에 안 된 해평을 앞에 앉혀놓고 무는, 고구려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거듭 다짐을 주었었다. 책성의 동부욕살 하대곤에게 보내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아, 아버님! 그때 왜 소자에게 고구려 왕손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어요?”

해평은 원망이라도 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깜짝 놀라 해평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하대곤이 서 있었다.

“앗, 아버님!”

“지금 왕손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을…….”

낮에 해평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친부 무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하대곤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새 전처럼 양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님! 소자는 아직도 제가 왕손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더욱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해평은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화 때문이겠지?”

“……네?”

“그리고 왕자 이련 때문이겠지?”

하대곤은 해평의 아픈 가슴을 찔렀다.

“……아버님!”

해평은 그렇게 불러놓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도 네 마음을 잘 안다. 지금 네 마음이 아픈 것은 네가 그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왕손이면서도 지금 당장은 왕자 이련만도 못한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나도 마음속으로는 종제인 하대용과 인연을 끊었다. 하가촌에서 떠나기 전날 하대용과 연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대용의 마음은 완전히 왕자 이련에게 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연화와 맺어줄 생각인 모양이다. 당장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이유는 단 하나 이련이 대왕 사유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지금 당장은 참는 길밖에 없다. 연화가 여장부답고 후덕하여 너의 배필로 점찍어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한다.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하대곤은 말끝에 한숨을 빼어 물었다.

“사랑이란 남녀의 일이온데, 어찌 소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양보를 하란 말씀입니까?”

해평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것이 권력의 힘이다. 너도 왕손이긴 하지만 현재로선 신분을 밝히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현재 나는 대왕 사유의 힘에 눌리고, 너는 왕자 이련보다 여건이 좋지 못하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대곤은 그러면서 해평의 안색을 살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억울합니다. 먼저 혼담이 오간 것은 소자인데, 갑자기 나타난 이련에게…….”

해평은 뒷말을 생략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힘을 길러야 한다. 현재 대왕 사유는 이미 늙었고, 사후에는 태자 구부가 왕위를 잇겠지. 구부에게는 아들이 없다. 현재로서는 태자비가 아닌 다른 여인을 취한다 해도 아들을 낳기 힘들어. 태자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거든. 그렇다면 구부 다음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왕자 이련밖에 없다. 내 생각에 이련은 왕자(王者)로서 부족함이 많다. 현재의 대왕 사유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을 꼭 빼어 닮았어. 지금 고구려는 서쪽으로 연나라 다음으로 일어선 부견의 진나라와 남쪽으로는 발해에서 황해에 이르는 해상권까지 장악한 백제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장담할 수가 없어. 미천대왕 때처럼 강력한 왕권이 들어서야만 고구려에는 희망이 보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는 알겠지?”

하대곤은 뚫어질 듯 해평의 눈을 주시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쳤다. 그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어둠 속으로 묻혔다.

“왜 대답이 없느냐?”

하대곤이 다그쳤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련에게 가기 전에 먼저 연화를 빼앗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평은 이를 악물었다.

“여자는 잊어라. 지금은 우리에게 힘이 없다고 하지 않더냐? 그보다도 나라를 경영하려면 문무를 겸비한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바쁘다. 경서는 물론이고, 병법서를 많이 보아야 하느니라. 강력한 군주는 전술전략에서도 그 어느 장군보다 뛰어나야만 해. 그래야 장군들이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고 따른다.”

“…네!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해평은 하대곤에게 고개를 숙였다.

“밤이 깊었다. 들어가 자거라.”

하대곤이 먼저 해평을 뒤로 하고 침소로 향했다.

그러나 해평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불룩하게 배를 내민 달이 그의 그러한 모습을 뻔뻔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잊어라…….”

해평은 한숨을 푹 쉬면서 방금 전에 하대곤이 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되뇌어보았다.

‘오라버니와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에요. 제발 연화를 잊어주세요.’

어디선가 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해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허공을 쳐다보다가 배가 불룩한 달과 마주쳤다. 연화가 그 달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해평에겐 그것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솟소쩍, 소쩍!

소쩍새가 울었다.

“저 소쩍새까지도 나를 깔보는군!”

해평은 부쩍 자존심이 상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6

 

들판에는 파릇한 풀들이 한창 돋아나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저 먼 곳에서 풀 냄새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한 뼘쯤 자라난 초봄의 초록 들판을 말 두 마리가 달리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는 두 마리의 말 위에는 남녀가 각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 질러 강가에 닿자 두 사람은 말을 멈추었다. 왕자 이련과 연화였다.

“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 천지가 나온단 말이지요?”

이련이 강물을 바라보며 연화에게 물었다.

“태백산 천지에서는 늘 물이 흘러넘쳐요. 달문을 통해 흘러내린 물이 폭포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우렁찹니다. 천지의 물이 태백산 깊은 골짜기마다에서 흘러내리는 물들과 합쳐져 세 개의 강줄기를 이루지요. 그 하나가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 또 하나가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이고, 그리고 바로 이 압록강이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랍니다.”

연화는 압록강가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태백산 천지도 자주 가보았고, 강줄기를 따라 난 길로 말을 달려본 경험도 많았다.

이련은 어려서부터 말로만 듣던 태백산 천지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전렵 행사에 부왕을 따라나선 것인데,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놓쳤다.

다리가 완쾌된 후 연화에게 태백산 천지를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한 것은 이련이었다.

“낭자! 나를 태백산 천지까지 안내해줄 수 있겠소?”

이련은 천지도 보고 싶었지만, 내심으로는 연화와 단둘이 나들이를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왕자님, 그 일이라면 아버님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연화가 말했다.

“하대인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소.”

이련은 하대용을 찾아가 연화와 함께 태백산 천지를 구경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하였다.

“지난 번 천제 때 참여치 못한 게 못내 서운하셨던 모양이군요. 왕자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소원을 들어드려야지요. 다만 연화만 데려갈 경우 왕자님 신변이 걱정되오니, 추수도 함께 가도록 하시지요.”

하대용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태백산 자락에는 말갈족의 무리도 많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냥꾼들도 자주 출몰하였다. 그리고 혹여 호랑이나 곰 같은 같은 맹수라도 만날 경우를 대비하여 사냥의 고수인 추수를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버님, 이 연화의 실력을 못 믿으시는군요. 추수까지도 필요 없어요.”

왕자 이련 옆에 있던 연화가 얼른 끼어들었다. 추수가 동행하게 되면 두 사람에게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대인, 나도 앞가림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련도 연화와 단둘이서만 떠나고 싶었다.

하대용은 두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련과 연화가 태백산 천지를 유람하기 위해 떠날 때, 하대용은 몰래 추수를 불러 당부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만 보내는 것이 불안하다. 너는 내일 아침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몰래 멀리서 뒤를 따르도록 해라. 알겠느냐? 두 사람이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라.”

“……네! 대인 어른!”

추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왜? 마음에 내키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대인 어른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추수는 예를 올린 후 물러나왔다.

사실 추수는 왕자 이련과 연화가 태백산 천지를 유람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하였다. 도중에 그들을 해코지 할 무리들이나 호환을 만날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추수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추수는 하대용의 명이라면 불속이라도 뛰어들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련과 연화의 뒤를 미행하라는 명을 따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대인 어른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추수는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추수는 왕자 이련과 연화가 집을 나설 때 그들의 뒤를 몰래 밟았다. 앞서 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먼 거리에서 천천히 말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련과 연화는 멀리 뒤에서 추수가 미행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한가롭게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태백산 천지를 보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연화가 먼저 앞질러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이랴!”

이련도 뒤따라 말에 채찍을 가했다.

두 마리의 말은 들판을 질주하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를 하듯 달리다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기도 하는 등 연초록의 산야를 헤엄치고 있었다. 말과 사람이 한 몸으로 출렁이면서 만들어내는 그 속도감과 유연한 동작들은 자연 속의 유영(遊泳)이라고 해도 좋았다. 앞에서 두 마리의 말이 유영하는 동안, 나무에 가려졌다 보이고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추수가 뒤에서 몰래 좇아가고 있었다.

태백산 자락으로 접어들자, 밀림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직립으로 우뚝 선 나무들은 저마다 키 재기를 하듯 꼿꼿하게 곧추서 있었다. 밀림 지대를 지나자 산등성이가 훤히 드러났다. 점차 산을 오르면서 나무들은 듬성듬성 서 있었고, 키도 점점 작아졌다. 나중에는 작은 풀들만 산등성이를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산 중턱을 지나면서부터 이련과 연화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해 말들조차도 힘이 들어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백산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 평탄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말들을 풀어놓아 마음대로 풀을 뜯게 하고 곧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평지 같은 초원에서 산 정산으로 오르는 길을 매우 가팔랐다. 자칫 발을 잘 못 딛게 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모래 같은 돌가루들 때문에 길은 더욱 미끄러웠다.

“자, 내 손을 잡아요.”

이련이 연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왕자님도 힘드실 텐데…….”

그러면서도 연화는 이련의 손을 잡았다.

말 타기에선 연화가 앞선다 하더라도 경사진 산비탈을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남자인 이련의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

천지가 보이는 태백산 정상에 올라서자, 이련은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과연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명산이로군! 이번에 천제를 지낼 때 와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데, 오늘 이렇게 연화 낭자와 함께 천지를 바라보니 감개가 또한 남다르구려.”

“어떻게 남다른가요, 왕자님?”

연화가 이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련이 갑자기 긴장된 얼굴로 연화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천지를 보는 순간, 연화 낭자를 나의 배필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소. 나는 이 자리에서 태백산 천지와 약속을 하겠소. 연화 낭자와 반드시 결혼을 하기로. 이는 천지신명과의 맹세이기도 하오.”

이렇게 말하는 이련은 열세 살의 소년답지 않고 의젓했다. 이미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을 비로소 꺼낸 것처럼 뜸을 들이거나 더듬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이련은 슬그머니 연화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일이었으나 연화는 잡힌 손을 애써 빼내지 않았다.

“왕자님! 소녀의 나이가 왕자님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괜찮겠어요?”

연화는 은근히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물었다. 아직 왕자가 결혼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에 가까이 있어도 크게 떨리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스레 가슴이 벌렁거렸다. 열세 살의 왕자가 이성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나는 연화 낭자가 병간호를 해줄 때 어마마마를 많이 생각했소. 네 살 때 돌아가시고부터 나는 어린 시절을 어마마마 없이 자랐소. 모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모처럼 연화 낭자를 만나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소. 모성애와 비슷한 느낌,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소. 낭자, 사랑하오.”

이련은 연화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머!”

연화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떼려고 하자, 이련은 상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실상은 그 순간, 연화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한 몸이 된 채 서 있었다.

천지 위로 안개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맑은 날씨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었고, 수면 위로 퍼지던 안개가 자욱하게 천지를 점령해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처럼 태백산 천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곧 비가 오려나 봐요.”

연화가 이련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안개 자욱한 천지를 바라보았다.

“하느님께서 천지에 축복의 비를 내려주실 모양이오.”

“축복의 비요?”

“천제를 지내러 오기 전에 아바마마께서 내게 말씀하셨소. 태백산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버지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연 곳이고, 지금은 각기 나라가 갈라져 나갔지만 고구려를 위시한 우리의 주변국들은 모두가 단군왕검의 자손이라고. 추모대왕께서도 구토(舊土)를 회복하겠다는 ‘다물정신(多精神)’의 꿈을 갖고 고구려를 건국하셨소. 구토는 바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말하나, 지금은 고구려·부여·백제 등으로 갈라져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소. 우리가 결혼하기로 약속하는 순간, 하늘이 축복의 비를 내려주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겠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토를 회복할 영웅을 점지해주신다는 뜻 아니겠소?”

이럴 때 이련은 열세 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청장년이 되어 있었고, 나라를 걱정할 만큼 인격적으로 충분히 왕자지도(王者之道)를 갖추고 있었다.

이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둑우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어느 새 천지는 안개가 가득 차올라 수면조차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과 안개가 한데 뒤엉키면서 땅의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때 번쩍, 하며 번개가 치더니 쿠르르릉, 천둥이 울었다.

번개의 불빛이 먹장구름을 가르고 천지로 내리꽂히는 바로 그 순간, 그 반작용처럼 수면에서 꿈틀대며 황룡이 하늘로 용솟음치는 것을 두 사람은 보았다. 번개가 치면서 안개와 구름의 조화가 빚어낸 결과이지만, 그 번뜩이는 빛깔과 꿈틀대는 움직임과 형용키 어려운 형상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았다.

“어머, 왕자님! 방금 황룡을 보았어요!”

연화가 먼저 소리쳤다.

“오, 나도 보았소. 연화 낭자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국모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생각했소.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태자이신 구부 형님이 왕위를 잇게 되겠지만, 태자께선 아들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순서는 내가 될 것이오.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들어 추모대왕의 다물정신을 실천할 아들을 낳을 것이오.”

이련은 다시 연화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잡은 손에는 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의 약속이었다.

 

7

 

태백산 정상으로 몰려들었던 먹구름이 어느 사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하늘은 다시 맑아 언제 소나기를 뿌렸느냐는 듯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다만 뭉게구름 몇 조각이 돛단배처럼 여유롭게 떠서 하늘 가운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추수는 태백산 산림지대에 말을 숨긴 채 왕자 이련과 연화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밀림을 벗어나면 나무도 별반 없는 산등성이이므로, 더 이상 올라갔다간 들킬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한 차례 빗줄기가 지나간 후 숲속에 말을 세워놓고 햇볕 가운데 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달려오는 한 떼의 인마들이 보였다. 추수는 흰 사슴 한 마리가 그들에게 쫓겨 저쪽 숲속으로 달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저 놈을 사로잡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대장인 듯한 자가 말을 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졸개들이 흰 사슴을 향해 우우우, 아우성을 치며 목청을 높였다.

‘도대체 저놈들은 누구일까? 흰 사슴은 영물이라 잡지 않는 법인데, 함부로 사냥을 하려 들다니…….’

이렇게 마음속으로 뇌까린 추수는, 곧 말안장 뒤에 챙겨둔 올가미를 꺼내들고 흰 사슴이 달아난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놔두고 맨몸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그네처럼 건너뛰면서 흰 사슴의 뒤를 바짝 쫓았다. 사냥꾼들도 그가 나무숲 사이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동작은 민첩했고, 울창한 나무숲은 그의 몸을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언덕을 넘자 계곡 아래에서 흰 사슴이 헐떡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추수는 올가미를 날려 흰 사슴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냥꾼들이 언덕 위에 나타나기 전에 동작 빠르게 흰 사슴을 근처 바위 동굴 속에 숨겼다.

잠시 후 사냥꾼들이 계곡으로 들이닥쳤다. 앞장서서 달려온 대장인 듯한 자는 뜻밖에도 해평이었다. 뒤미처 나타난 십여 명의 졸개들은 책성의 군사들이 분명했다.

“아니, 네가 여긴 웬일이냐? 혹시 방금 이쪽으로 달아난 사슴을 보지 못했느냐?”

해평이 추수를 보고 화들짝 놀랐으나, 급히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도련님께서 나를 사슴으로 본 모양이군요!”

추수는 흰 이를 싱끗 드러내며 웃었다.

“뭐야?”

“이 계곡으로는 사슴이 아니라 산토끼 한 마리도 오지 않았소.”

“추수, 네놈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내 흰 사슴을 네놈이 먼저 잡아 어디다 숨긴 것이 아니더냐?”

해평은 추수를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흰 사슴이라니요? 내가 지금까지 오래도록 태백산에서 사냥을 해오면서 흰 사슴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소. 예로부터 흰 사슴은 영물이라 하는데, 그걸 보았단 말이오?”

추수는 짐짓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정말 흰 사슴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영물을 잡으려고 하다니, 그게 될 말이오? 저 옛날 태조대왕께서 책성을 순수(巡狩)할 때 백록(白鹿)을 얻었다는 얘긴 들었소만. 흰 사슴은 아무 눈에나 띄지 않는 법이오. 태조대왕처럼 타고난 영웅에게나 나타나는 법이외다. 태조대왕은 요서와 요동을 정벌한 영웅이었다고 들었소.”

추수는 스승 을두미에게서 들었던 풍월을 그대로 읊어댔다. 딴에는 숨겨둔 흰 사슴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입에서 지껄여지는 대로 둘러대고 있는 것인데, 그 소리를 듣는 해평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허허헛! 추수, 네놈이 의외로 아는 게 많구나?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느냐?”

해평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어떤 기대감을 갖고 추수의 입을 바라보았다.

“을두미 스승님께 들었소이다.”

“음, 그래? 태조대왕께서 백록을 얻으셨다? 그러고 나서 요서와 요동 공략에 성공했단 말이지?”

해평은 한참 동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해평 도련님께서 웬 일로 흰 사슴에 대해 관심이 그리 많으십니까?”

추수는 약간 비꼬는 듯한 투로 해평의 말꼬리를 잡았다. 그가 자꾸 시간을 끄는 것은 왕자 이련과 연화가 태백산 정상에서 내려와 해평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쩐지 그래야 한다고 추수는 생각하였다.

“흰 사슴을 화살로 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군. 영물인데 피를 보면 안 되겠지. 오늘 흰 사슴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행운이 아니겠는가. 얘들아, 오늘은 이만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자.”

해평은 말머리를 돌렸다.

“을두미 스승님도 흰 사슴은 행운을 가져다준다 하였소. 정말 오늘 흰 사슴을 보았다고 하니, 앞으로 해평 도련님께 행운이 돌아올 것 같네요.”

추수의 말에 해평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네가 말이 많은 걸 보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다. 사냥을 나왔다고 하지만, 너 혼자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터. 혹시 이련 왕자와 연화 낭자가 같이 온 것은 아니야?”

해평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산에서 나고 자라서 혼자 사냥을 다니는 데는 이골이 났소이다. 이련 왕자와 연화 낭자가 왜 이런 곳엘 오겠소?”

추수는 서둘러 변명을 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해평은 큰 길로 나서기 위해 벌써 말을 몰고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평의 무리가 숲 저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추수는 얼른 흰 사슴을 숨겨둔 바위 동굴로 가보았다.

올가미에 목이 얽힌 흰 사슴은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추수는 재빨리 올가미를 풀어 흰 사슴을 놓아주었다. 흰 사슴이 안전지대까지 피해갔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서둘러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추수는 해평의 무리가 왕자 이련과 연화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왕자와 연화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테지만, 추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말갈놈아! 왜 나를 속였느냐?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네놈이 이련 왕자님과 연화 낭자를 모시고 왔을 것이라고…….”

해평이 막 달려온 추수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오. 나는 따로 혼자서 사냥을 나왔을 뿐이오.”

추수는 자신이 몰래 뒤를 밟은 것을 왕자 이련과 연화에게 숨기기 위해서 변명을 해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련 왕자와 연화도 추수를 보고 잠시 놀란 눈치였으나, 해평의 무리 때문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지소리는 그만해라. 더 이상 네놈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 이련 왕자님과 연화 낭자가 이 태백산엔 웬 일이시오?”

해평은 추수에게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왕자 이련과 연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내가 묻고 싶어요. 해평 오라버니는 무리를 지어 이 태백산에 웬일로 오셨는지요?”

연화가 쌀쌀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 이 오빠가 너를 납치라도 할까봐 두려운가?”

해평은 비슬비슬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연화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것을 본 추수가 해평 앞으로 한 발짝 성큼 다가서며 소리쳤다.

“왕자님 앞에서 언사가 너무 거친 것 아니오?”

“크하하하! 오늘 선남선녀가 태백산 천지를 구경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누구인가 했더니 그 주인공이 이련 왕자님과 연화 낭자일 줄이야."

해평은 나오지도 않는 억지웃음을 웃었다.

“우리가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니, 누가 전해준 것이오?”

왕자 이련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해평에게 물었다.

“다 소식통이 있지요. 어젯밤 꿈속에서 그 소식을 전해 받았지요, 왕자님!”

그러면서 해평은 눈에 잔뜩 힘을 주어 추수를 쳐다보았다.

“왕자님, 여기서 길게 얘기할 것 없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연화는 더 이상 해평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으로 왕자 이련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럽시다.”

왕자 이련이 앞장섰고, 연화가 그 뒤를 따랐다. 조금 더 뒤에 떨어져서 추수가 그들의 뒤를 좇았다.

그러자 해평의 무리는 그들의 반대쪽으로 길을 잡아 왁자지껄 떠들면서 말을 달렸다. 그 길은 책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가촌으로 들어서기 전에 연화가 왕자 이련을 앞에 가도록 한 뒤, 뒤미처 따라오는 추수와 말머리를 같이 하여 물었다.

“추수야, 네가 해평 오라버니에게 우리의 소식을 전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인 어른이 몰래 왕자님과 연화 아가씨의 신변을 보호하라고 명하셔서 따라나섰을 뿐입니다.”

“그래? 이상한 일도 다 있군! 불과 어제 아버님께 왕자님과 태백산 천지에 간다는 걸 허락받았는데, 어찌 책성에서 그걸 알았단 말인가?”

못내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 않은 채, 연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해평 도련님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입니다. 저도 한번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연화 아가씨도 해평 도련님을 조심해야 합니다.”

추수는 거의 확신한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해평 오라버니에게 당했다는 것이냐?”

“그건…, 비밀입니다.”

추수는 지난 번 천제를 때 해평이 교시에게 칼을 댔던 그 비밀을, 죽을 때까지 입 속에 넣어 가지고 가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나라의 국운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예사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추수에게 나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구나!”

연화는 더 이상 묻지는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말을 달려 앞에 가는 왕자 이련을 따라잡았다.

말을 나란히 하고 하가촌으로 들어서는 왕자 이련과 연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추수는 아까부터 머리에서 맴돌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왜 없겠소? 연화, 그대를 연모하는 이 마음도 비밀인데…….’

그러면서 추수는 가슴이 메어졌다. 너무 답답하여 자신의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리고 싶어졌다.

 

<엄광용 약력>

-1954년 경기도 여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단국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벽 속의 새가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장편소설 황제수염사냥꾼들꿈의 벽 저쪽사라진 금오신화』 등이 있음.

-2015년 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류주현문학상 수상.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novelky 

엄광용 작가  koreanewstimes@kn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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